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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OS 단편 소설

청춘 (靑春)

푸른 숨결
1부.

제1화. 초침의 무게

스마트폰 화면 상단에서 붉은색 타이머가 1초 단위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04:59, 04:58, 04:57. 배달 대행 애플리케이션의 기계음 섞인 알림이 귓속에 꽂힌 이어폰을 찢을 듯 울려댔다. 오토바이 핸들을 쥔 방한 장갑 끝으로 스며든 삭풍이 손가락 마디마디의 감각을 둔탁하게 앗아갔다.

재희는 낡은 125cc 스쿠터의 스로틀을 쥐어짜며 빌딩 숲 사이의 칼바람을 갈랐다. 배달 통 안에는 식어가는 마라탕 비닐 포장이 플라스틱 바닥을 덜컹거리며 긁어대고 있었다. 빗길에 미끄러져 긁힌 무릎 보호대 틈으로 시린 한기가 파고들었지만, 100원 단위의 지연 할증을 피하려면 신호등의 노란 불을 향해 속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밤 11시 40분. 삼십 층짜리 주상복합 오피스텔 2404호 문앞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벨을 눌렀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날카로운 전자음과 함께 문이 반 뼘쯤 열렸다. 틈새로 훅 끼쳐오는 묵직한 난방 온기와 디퓨저의 달콤한 바닐라 향.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하얗고 매끄러운 손 하나가 쑥 나와 봉지 손잡이를 낚아채더니, 말 한마디 없이 문을 쾅 닫았다. 문손잡이에 걸린 배달 완료 사진을 찍어 올리자 화면에 숫자 3,400원이 떴다. 그것으로 한 인간의 15분이, 땀과 찬바람이 뒤섞인 비루한 노동이 가차 없이 정산되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기어 들어온 신림동 고시원의 사각 방은 숨이 막힐 만큼 비좁았다. 신발을 벗자마자 발가락 양말에 밴 땀 냄새와 벽지 구석의 곰팡이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보일러가 제대로 돌지 않아 방바닥의 장판은 차갑게 식은 쇳덩이 같았다.

재희는 패딩 점퍼도 벗지 못한 채 벽에 등을 기댔다. 책상 위에는 오늘 낮 편의점에서 집어 온 4,500원짜리 제육 도시락이 플라스틱 뚜껑에 물방울을 매단 채 굳어 있었다. 나무젓가락으로 굳은 밥알을 찔러 넣자, 미지근한 기름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비릿하게 넘어갔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후에 면접 결과를 확인하러 들어갔던 중소 IT 기업의 채용 사이트 알림이었다.

'윤재희 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인원으로 인해 귀하를 모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매끄럽게 다듬어진 기계적인 위로. 서른 번째인지 마흔 번째인지도 잊어버린 탈락 통보였다. 스물아홉의 겨울, 세상은 그를 1초 단위의 타이머와 100원짜리 배달 단가, 그리고 '불합격'이라는 석 자의 텍스트로만 규정하고 있었다.

씹다 만 밥알이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재희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얇은 합판 벽 너머로 옆방 사내가 틀어놓은 인터넷 방송의 천박한 웃음소리가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그 메마른 소음 속에서, 자신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캄캄한 침묵이 발목을 서서히 잡아끌었다.

제2화. 스와이프의 온도

어두운 방 안에서 푸르스름하게 번지는 스마트폰 불빛만이 재희의 퀭한 눈자위를 비추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굳은살 박인 액정 위를 기계적으로 밀어 올렸다. 오른쪽으로 넘기면 수락, 왼쪽으로 넘기면 거절.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의 화면 속에는 정교하게 보정된 얼굴들이 찰나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직장, 키, 거주지, 연봉 구간. 인간의 온기 대신 숫자로 환산된 스펙들이 바코드처럼 이마에 붙은 채 넘겨지는 세상이었다.

'매칭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전자음과 함께 짧은 대화창이 열렸다. 건대입구 근처의 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스물여덟의 직장인. 프로필 사진 속 화려한 필터 너머로 진짜 얼굴 따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재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겉옷을 걸쳐 입었다. 이 메마른 사각 방의 침묵을 견디는 것보다는 낯선 타인의 체온이라도 빌려 쓰는 편이 덜 끔찍했기 때문이다.

골목 안쪽의 시끄러운 이자카야는 주말 밤의 열기로 터질 듯했다. 짙은 화장 아래 피로를 숨긴 여자는 플라스틱 잔에 든 하이볼을 들이키며 쉼 없이 회사의 상사 험담과 주식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화에는 맥락도, 진심도 없었다. 공허한 말들이 튀김 찌꺼기처럼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고, 재희는 그저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서로의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혼자라는 서늘한 공포를 잊기 위해 마주 앉아 소음을 나누어 가질 뿐이었다.

새벽 두 시, 형광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모텔 골목으로 들어섰다. 눅눅한 락스 냄새가 진동하는 방, 스프링이 꺼진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몸이 부딪혔다.

살갗이 닿는 순간의 뜨거움은 지독히도 찰나였다. 여자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인공적인 복숭아 향수 냄새는 코를 찔렀고,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방 안은 방금 전보다 더 깊은 냉기로 가라앉았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창문 틈으로 기어들 무렵, 여자는 이미 옷을 챙겨 입고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덧바르고 있었다.

“나 먼저 가요. 첫차 탈 시간이라.”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낡은 도어록이 철컥 잠겼다.

재희는 흐트러진 침대 시트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땀이 식어 살갗에 엉겨 붙는 서늘한 느낌. 일회용 종이컵처럼 찌그러진 채 버려진 듯한 지독한 갈증이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랐다.

천장의 얼룩을 올려다보며 재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도시는 매일 밤 수많은 몸들을 뒤섞어 놓고는, 새벽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갑게 침을 뱉어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소모되고 버려지는 껍데기만이 그 눅눅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제3화. 박제된 이름표

모텔을 빠져나와 고시원으로 돌아온 아침, 문틀에 끼워진 노란색 쪽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방세를 보름이나 연체했으니 이번 주말까지 방을 빼라는 총무의 날림 글씨였다. 유예는 없었다. 보증금 백만 원은 이미 지난 석 달간의 밀린 월세와 전기세로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방바닥에 누런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종이 상자 세 개를 펼쳤다. 지난 몇 년간의 삶을 정리하는 데는 그 세 개의 상자로도 턱없이 공간이 남았다. 몇 벌 안 되는 후줄근한 계절 옷과 편의점 일회용 숟가락, 그리고 토익 문제집 몇 권.

책장 맨 위 칸 구석에 먼지를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던 파란색 플라스틱 바인더를 꺼내 들었다. 수십 장의 서류들이 철해진 취업 준비철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 잉크가 번진 수험표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어설프게 왁스를 바르고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던 스물다섯의 얼굴,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수험표, 기사 자격증 접수증, 그리고 면접 대기실에서 가슴팍에 달았던 빳빳한 종이 명찰들.

숫자 37번. 이름 대신 불렸던 번호.

'지원자 37번, 1분 자기소개 시작하세요.'

어두운 바인더 속에서 묵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것은 청춘의 찬란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도살장에 제 살점을 등급별로 잘라 내놓았던 규격 확인서에 불과했다. 이 종이 조각들을 모으느라 청춘의 새벽과 밤을 온통 독서실 백색 소음기 아래 묻어버렸건만, 손에 쥐어진 것은 유통기한이 지나 썩어가는 이력서뿐이었다.

바인더 맨 밑바닥에 눌려 있던 두꺼운 전공 서적 한 권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학 시절 중고 서점에서 샀던 문학 개론서였다.

벌어진 책장 틈새로 빳빳한 재생지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의 종이. 도서관 직인이 희미하게 찍힌 노란색 도서 대출 카드였다.

그 뒷면, 모눈종이 칸막이를 무시하고 푸른색 만년필 잉크로 꾹꾹 눌러쓴 정갈한 글씨가 재희의 시선을 옭아맸다.

'재희야, 8번 서가 맨 구석 창가 자리는 오후 세 시가 되면 햇볕이 참 따뜻해. 언젠가 모든 게 다 버거워지고 숨이 막히면, 우리 예전에 얘기했던 정선행 완행버스를 타자. 아무도 우리한테 등수를 묻지 않는 곳으로.'

한은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숨구멍이 틀어막히는 듯한 통증이 명치끝을 찔렀다.

잊고 있었다. 아니, 잊어야만 살 수 있어서 기억의 가장 어두운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던 이름이었다. 8년 전, 학점과 취업의 쳇바퀴로 도망치듯 떠나오며 매몰차게 밀어냈던 아이.

창틀 구석에 맺힌 성에가 녹아내리며 더러운 얼룩을 그리고 있었다. 재희는 떨리는 손끝으로 바랜 도서 대출 카드의 모서리를 어루만졌다. 락스 냄새와 기름때에 절어 있던 감각 너머로, 흙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햇볕을 머금은 은수의 맑은 목소리가 얼어붙은 귓전을 세차게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제4화. 동서울 터미널

강변역 4번 출구를 빠져나오자, 한강에서 불어닥친 칼바람이 재희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동서울터미널 대합실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퀴퀴한 가솔린 냄새와 토스트 굽는 기름 냄새, 그리고 수많은 발길에 짓이겨진 축축한 흙탕물이 뒤섞인 공기가 훅 끼쳐왔다.

대형 전광판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행선지들이 쉼 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부산, 대전, 전주, 속초. 번듯한 캐리어를 끌고 바쁘게 오가는 여행객들과 군복을 입은 휴가 장병들 틈에서, 재희는 어깨에 멘 낡은 등산 가방의 끈을 바짝 조여 맸다. 가방 안에는 갈아입을 속옷 몇 벌과 지갑, 그리고 외투 안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은수의 도서 대출 카드 한 장이 전부였다.

자동발매기 모니터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목적지 검색창에 두 글자를 입력하자 화면 밑바닥에 시간표가 떴다.

[정선 방면 / 07:10 / 17번 홈]

카드를 긁자 영수증과 함께 얇은 종이 승차권 한 장이 툭 떨어져 나왔다. 잔액 42,300원. 배달 대행 앱의 계좌를 털고 남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은 어둡고 눅눅했다. 매캐한 디젤 매연이 자욱한 승차장 맨 끝, 17번 팻말 아래 주황색 시외버스 한 대가 덜덜거리며 굵은 엔진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버스 앞유리창 구석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었고, 흙먼지가 두껍게 덮인 바퀴는 오랜 주행의 피로를 고스란히 묻혀내고 있었다.

“정선 가요? 표 줘요.”

목장갑을 낀 기사가 무심하게 승차권 귀퉁이를 찢어내며 턱짓을 했다.

버스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벨벳 시트 특유의 텁텁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무 개 남짓한 좌석 중 사람이 들어찬 자리는 대여섯 군데에 불과했다. 보따리를 품에 안고 조는 노파 하나와 두꺼운 방한복을 입은 중년 사내 둘이 전부였다.

재희는 맨 뒤쪽 창가 자리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덜컹거리는 진동과 함께 버스가 후진하며 터미널 매연 속을 빠져나갔다. 올림픽대로로 진입하자 흐린 아침 안개 너머로 빽빽하게 솟은 아파트 단지들과 출근길 붉은 브레이크등의 긴 행렬이 차창 밖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도시였다. 저 대열에서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공포가 지난 십 년간 재희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두었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는 그 거대한 톱니바퀴의 흐름을 거슬러 동쪽의 산맥을 향해 머리를 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 끝으로 도서 대출 카드의 까칠한 모서리를 더듬었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퇴로는 이미 끊겼고, 닿아야 할 곳은 8년 전의 아득한 기억뿐이었다. 창문에 닿은 이마를 통해 차가운 유리창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심장 한구석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멎어버렸던 둔탁한 고동이 미세하게 다시 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2부.

제5화. 굽이치는 국도

버스가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38번 국도의 굽잇길로 접어들자, 차창 밖의 풍경은 잿빛 빌딩 숲에서 험준한 산줄기로 가파르게 바뀌어 갔다.

바퀴가 덜컹거릴 때마다 낡은 차체의 쇠붙이들이 삐걱대는 비명을 질렀다. 창틀의 고무 패킹이 헐거워진 틈으로 들이치는 바람은 서울의 그것과 결이 달랐다. 아파트 옥상과 아스팔트 바닥을 훑으며 달궈진 탁한 공기가 아니라, 바위틈을 뚫고 자란 마른 침엽수와 얼어붙은 흙이 뿜어내는 날것의 서늘한 숨결이었다.

고갯길을 오를수록 산허리에는 짙은 안개가 떡시루처럼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간헐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빛바랜 도로 표지판들만이 낯선 지명을 깜빡이며 지나쳤다. 제천, 영월, 그리고 정선. 지명이 바뀔수록 차창 밖의 인적은 드물어졌고, 길가에 드문드문 서 있는 농가들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지난밤 내린 서리가 하얗게 엉겨 붙어 있었다.

재희는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버스 바닥에서 올라오는 엔진열은 미지근했고, 입을 벌릴 때마다 옅은 입김이 유리창에 번져 바깥의 첩첩산중을 흐려놓았다.

불과 서너 시간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것들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카카오톡 단체방의 무의미한 알림, 배달 대행 프로그램의 1초 단위 독촉, 면접관들의 무표정한 안경 너머 시선. 그 모든 것이 이 거대한 산맥의 주름 속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지워지는 듯했다.

버스가 급커브를 돌며 속도를 줄였다.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계곡은 바닥까지 훤히 드러날 만큼 말라붙어 있었고, 거대한 암석들 사이로 살얼음이 낀 여울물이 은빛 비늘처럼 번뜩였다.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과 속도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실감이 그제야 서늘한 전율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 버스가 멈춰 서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은수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허망한 옛 기억의 잔해를 확인하러 가는 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밀려나 떨어지느니, 제 발로 안개 자욱한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편이 훨씬 숨쉬기 편했다.

버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짙은 안개의 장막 속으로 더 깊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산그늘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제6화. 녹슨 정류장

버스는 낡은 브레이크 마찰음을 길게 토해내며 덜컥 멈춰 섰다.

“정선 안흥마을 들어가는 손님, 내려요!”

기사의 거친 목소리에 재희는 흠칫 놀라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칼날 같은 산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이닥쳤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버스는 꽁무니에서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굽은 국도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적막이었다. 귓전을 찢을 듯 울려대던 도시의 기계음이 거짓말처럼 지워진 자리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정류장은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었다. 양철 지붕은 녹이 슬어 붉은 부스럼처럼 일어났고, 푸른색 페인트가 흉터처럼 벗겨진 플라스틱 벤치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낙엽 몇 장과 거뭇한 흙먼지가 수북했다.

정류장 기둥에 붙은 버스 시간표는 비바람에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해 글씨가 뭉개져 있었다. 하루에 단 세 번 완행버스가 오가는 벽지였다.

재희는 가방을 고쳐 메고 벤치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냈다.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차갑고 까슬까슬한 탄가루 섞인 흙의 감촉.

저 멀리 시선을 돌리자, 잿빛 하늘 아래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오래된 저탄장 구조물이 산비탈에 거대한 흉물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 검은 황금이라 불리던 석탄을 토해내며 수많은 사람의 땀과 비명이 들끓었을 광산 마을. 그러나 이제는 번영의 찌꺼기만 남긴 채, 폐광의 거대한 침묵 속에 굳어버린 박제된 공간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상단의 안테나 표시가 두 칸으로 줄어들더니, 배터리 잔량 숫자가 추위에 급격히 깎여 나갔다. 번쩍이던 서울의 불빛 아래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완전한 고립감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은수가 남겼던 도서 대출 카드를 꺼내 쥐었다. 종이 표면은 그의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덥혀져 있었다.

은수는 대학 시절, 제 고향이 폐광 너머 산자락에 묻힌 작은 분교 마을이라 했다. 흙먼지와 메마른 바람 속에서도 봄이 오면 산비탈에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다며, 자판기 커피를 쥔 손으로 배시시 웃곤 했었다.

재희는 낡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길은 아스팔트가 끊기고 거친 자갈과 얼어붙은 진흙이 뒤섞인 비포장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낯설고 황량한 풍경이었지만, 서울의 차가운 보도블록을 디딜 때마다 느껴지던 밑 모를 피로감은 없었다. 거친 흙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얼어붙은 대지가 신발 밑창을 통해 묵직하고 단단한 감각으로 전해져 왔다.

제7화. 침묵의 갱도

오솔길을 따라 십여 분을 걸어 들어가자, 산기슭에 위태롭게 얹힌 슬레이트 지붕 대여섯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목 어귀, 빛바랜 옥외 간판에 '선창식당'이라는 붉은 글씨가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낡은 함바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끼이익, 하는 쇳소리와 함께 기름때에 찌든 알루미늄 미닫이문이 열렸다.

문 안쪽의 공기는 밖과 전혀 다른 결로 묵직했다. 볏짚 태우는 냄새와 쿰쿰하게 익은 묵은지 냄새, 그리고 연탄난로 위 주전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눅눅한 수증기가 좁은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장 구석진 원형 양철 테이블에 사내 셋이 둘러앉아 있었다. 낡은 방한 작업복을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노인들이었다. 손톱 밑에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박혀 지워지지 않은 검은 탄가루가 문신처럼 굳어 있었고, 거칠게 갈라진 손등은 마른 논바닥을 연상시켰다.

“……손님 받을 만한 거 없는데. 칼국수나 한 그릇 말아 주까?”

주방 쪽 쪽문에서 굵은 허리께에 앞치마를 두른 노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투박하지만 경계 없는 시선이 닿았다.

“네, 아무거나 주셔도 됩니다.”

재희는 난로 곁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양철 테이블 맞은편에서 소주잔을 비워내던 노인 하나가 헛기침을 뱉어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가래가 끓어오르는, 갱도 깊은 곳의 분진을 평생 마셔온 자 특유의 긁히는 숨소리였다.

“젊은 양반이 이 썩은 골짜기엔 뭣하러 들어왔노. 서울서 노름판 털리고 도망쳐 온 꼴은 아닌디.”

“그냥…… 사람 하나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 여게 남은 사람이라곤 관 짤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들밖에 없어. 젊은 것들은 스무 해 전에 탄광 문 닫힐 때 기차 타고 다 도망갔지.”

노인은 퉁명스럽게 뱉고는 깍두기 한 조각을 이도 성치 않은 잇몸으로 우적우적 씹었다. 그러나 그 거친 말투 밑바닥에는 타향의 젊은이에 대한 비릿한 연민 같은 것이 엉겨 있었다.

잠시 후 노파가 커다란 양은 냄비에 끓여낸 손칼국수를 툭 내려놓았다. 울퉁불퉁하게 썬 면발 위로 거친 김가루와 애호박 몇 점, 그리고 멸치 대가리로 우려낸 투박하고 걸쭉한 국물이 김을 피워 올렸다.

숟가락을 들고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삼켰다. 조미료의 자극적인 맛 대신, 거칠고 짠 멸치 냄새와 흙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뜨겁게 쏟아져 내렸다. 편의점 삼각김밥과 식어빠진 배달 음식으로 틀어막았던 지난 몇 년간의 위장이 비로소 살아 있는 음식을 받아들이며 요동쳤다.

젓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고 허겁지겁 면을 삼키는 재희의 정수리를 향해, 노인이 말없이 소주 한 잔을 채워 밀어 넣었다.

“천천히 쳐무라. 목 멘다. 쫓아오는 놈도 없는디 뭘 그리 급하게 삼키노.”

투박하게 건네진 투명한 소주잔 위로, 연탄난로의 붉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숫자와 효율로 사람의 목을 조르던 도시에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날것 그대로의 거친 온기였다. 국물에 데인 혀끝이 아려왔지만, 가슴속을 짓누르던 돌덩이 하나가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제8화. 활자의 숲

소주 한 잔을 비워내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알코올의 열기가 귓바퀴까지 붉게 달궈놓았다. 식당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산기슭의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지만, 온몸에 번진 온기 덕에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재희는 폐광 터를 등지고 마을의 가장 높은 비탈길로 걸음을 옮겼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8년 전, 대학 도서관의 묵직한 공기가 환영처럼 겹쳐졌다.

중앙도서관 지하 2층, 8번 서가는 언제나 인적이 드물었다. 최신 수험서와 취업 관련 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 책장이 닳아빠진 1층 열람실과 달리, 그곳엔 누렇게 바랜 철학서와 아무도 찾지 않는 시집들만이 퀴퀴한 종이 냄새를 풍기며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스물둘의 재희는 언제나 그 8번 서가 맨 구석, 오후 세 시면 좁은 창틀로 기다란 볕이 비쳐 들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학점 관리와 자격증 스터디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도망쳐 온 그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은수를 처음 본 것도 그 창가 자리였다.

그녀는 소매가 늘어난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낡은 시집을 무릎 위에 올려둔 채 볕을 쬐고 있었다. 작은 턱선 위로 떨어지던 맑은 햇살, 그리고 종이를 넘길 때마다 사각거리던 얇은 손가락.

말을 건넬 용기는 없었다. 대신 재희는 서가 사이에 꽂혀 있던 릴케의 시집 갈피에 연필로 짧은 문장을 적어둔 쪽지 한 장을 끼워 넣었다.

'오늘 창밖으로 지는 노을이 꼭 타버린 성냥개비 같네요.'

다음 날 같은 시간, 책을 펼쳤을 때 그 자리엔 푸른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답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냥개비치곤 너무 붉어서, 꼭 산 너머 찔레꽃 군락 같아요. 내 고향 산골에도 지금쯤 저런 붉은 꽃이 피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름도, 학번도 묻지 않은 채 두 사람은 8번 서가의 낡은 책들을 우체통 삼아 비밀스러운 대화를 이어갔다. 취업 시장의 스펙으로 재단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무용하지만 가장 순수했던 문장들이 그 어두운 서가 사이를 날아다녔다.

은수의 글씨는 언제나 맑고 단단했다. 점수에 쫓겨 발을 동동 구르던 재희의 조급함을, 그녀의 문장은 깊은 산골의 샘물처럼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곤 했다.

비탈길 중턱에 멈춰 선 재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차디찬 겨울바람 사이로, 도서관 서가 뒤편에서 은수가 건네던 낡은 종이 냄새가 환각처럼 콧끝을 스쳤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던 그 시절의 자신과, 그 시절을 온전히 지켜봐 주던 맑은 눈동자가 산 아래 잿빛 풍경 위로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9화. 서가 뒤의 온기

도서관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릴 때면, 두 사람은 서가를 빠져나와 낡은 학생회관 뒤편의 자판기 앞으로 향하곤 했다.

동전 투입구에 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밀어 넣을 때 나던 짤깍거리는 쇳소리.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얇은 종이컵 안으로 쏟아져 내리던 자판기 믹스커피의 달착지근한 냄새는, 늦은 가을밤의 스산한 바람을 단번에 지워낼 만큼 따스했다.

은수는 두 손으로 얇은 종이컵을 감싸 쥐고 연신 입김을 불어댔다. 종이컵 겉면으로 배어 나오는 온기에 붉게 물들던 그녀의 손끝과, 뽀얀 김 너머로 반달처럼 휘어지던 눈매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재희야, 넌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되고 싶어?”

그 시절, 동기들이 모이면 으레 오가는 대화는 토익 점수 몇 점을 넘겼는지, 어떤 대기업의 인턴 공채가 떴는지에 대한 계산뿐이었다. 그러나 은수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는 그 어떤 저울질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재희는 한참 동안 플라스틱 막대로 커피를 휘젓다가 웅얼거리듯 답했었다.

“글쎄…… 남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번듯한 명함 한 장 쥐는 거. 뒤처지지 않고 제 몫을 하며 사는 거.”

그 말에 은수는 말없이 자판기 옆 벤치에 걸터앉아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난 그냥, 내 속도대로 걸어도 숨이 차지 않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계절이 바뀌는 걸 제때 알아채고, 길가에 핀 작은 풀꽃 이름 하나에 가만히 발을 멈출 줄 아는…… 그런 사람.”

그때의 재희는 그 말의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산골 출신 아이의 철없는 낭만쯤으로 치부하며 쓰게 웃었을 뿐이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남들보다 한 칸이라도 앞서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치느라, 제 발밑의 꽃은커녕 계절이 언제 지나가는지도 잊은 채 십 년을 내달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서른 살의 언저리에서 손에 쥔 것은, 은수가 경계했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질식해 버린 괴물' 같은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비탈길에 멈춰 선 재희는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두 손을 꽉 쥐었다.

자판기 커피의 달콤하고 텁텁했던 잔향, 그리고 쌀쌀한 밤공기 속에서 닿을 듯 말 듯 스쳤던 은수의 카디건 소매 끝. 그 소박하고 따스했던 기억들이, 굳어버린 심장 언저리를 시리도록 아프게 파고들고 있었다.

제10화. 낡은 민박집

산그림자가 걷히기 무섭게 어둠은 묵직한 돌덩이처럼 마을을 집어삼켰다. 비탈길 끄트머리, 녹슨 양철 대문 옆에 ‘달빛민박’이라는 낡은 나무 팻말을 내건 집이 나타났다.

마당에 들어서자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기름보일러의 둔탁한 기계음과 매캐한 등유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 속에 엉겨 붙었다. 방으로 안내한 안주인은 낡은 요 한 채와 모서리가 닳은 베개 하나를 방바닥에 툭 내려놓고는 미닫이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은 서늘했다. 장판 구석은 기름보일러의 열기로 간신히 미지근했지만, 흙벽의 갈라진 틈새로는 산바람이 실뱀처럼 스며들었다. 형광등 스위치를 내리자 칠흑 같은 어둠 대신, 창호지를 바른 문창살 너머로 서늘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격자무늬 문창살의 그림자가 노란 장판 바닥 위에 선명한 사각 틀을 그렸다.

재희는 패딩을 벗고 차가운 요 위에 누웠다. 등허리로 전해지는 딱딱하고 메마른 방바닥의 감촉. 스마트폰을 켜보았지만, 신호는 완전히 끊겨 시계 숫자만이 허옇게 떠 있었다. 1초 단위로 사람을 옥죄던 타이머도, 언제 올지 모를 합격 통보의 불안도 없는 완전한 진공의 상태였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서까래의 거친 결 사이로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도서관 8번 서가, 자판기 커피의 김, 그리고 은수가 말했던 그 조용한 삶의 속도.

그 시절의 은수는 이 방의 문창살처럼 정갈하고 단단했다. 남들의 눈치나 세상의 조급함에 흔들리지 않고 제 궤도를 지키던 아이. 그런 은수를 제 손으로 밀어내고 세상의 거대한 쳇바퀴 속으로 뛰어들었던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물방울처럼 하나둘 가슴팍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산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문풍지를 세차게 흔들어댔지만, 재희는 난생처음으로 쫓기지 않는 깊고 긴 밤의 침묵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3부.

제11화. 어긋난 궤도

어둠 속에서 문풍지가 파르르 떠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스물다섯 여름의 그 눅눅하고 끔찍했던 장마철이 떠올랐다.

첫 번째 대기업 공채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양복 대여점에서 빌려 입은 정장의 소매 끝은 비에 젖어 묵직했고, 구두 안쪽에는 흙탕물이 스며들어 걸을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노량진의 좁은 골목길 포장마차 안에서 재희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수는 젖은 휴지로 그의 흙 묻은 구두 앞코를 조용히 닦아내고 있었다.

“재희야, 괜찮아. 한 번 넘어진 것뿐이잖아.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 순수한 위로가, 그날의 재희에게는 살갗을 후벼 파는 모욕처럼 느껴졌다.

점수와 등수로 매겨지는 세상의 비정한 논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온실 속 화초처럼 태연하게 던지는 말이 귓전을 때렸다. 재희는 탁자 위에 놓인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은수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네가 뭘 알아? 너처럼 한가하게 시나 읽고 산골 이야기나 하는 애가, 내가 매일 아침 어떤 지옥으로 기어들어 가는지 알기나 해?”

은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손끝에 묻은 흙탕물을 미처 털어내지도 못한 채, 그녀는 멍하니 재희를 바라보았다.

“난 지금 한 칸이라도 올라서지 못하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판이야. 너랑 시시덕거리며 커피나 마실 여유 따위 없어. 너랑 있으면…… 내가 자꾸 물러터지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혀.”

비겁한 열등감이었다. 자신의 초라함을 견디지 못해 가장 아끼던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버린 잔인한 자격지심이었다.

은수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눈시울로 재희의 일그러진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가방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젖은 손바닥에 쥐여주었을 뿐이었다.

“……미안해, 재희야. 네 짐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은수는 빗속으로 걸어 나갔고, 재희는 잡지 않았다.

등 뒤로 멀어지던 은수의 작은 어깨를 외면한 채, 재희는 그 후로 5년을 더 독서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서 제 영혼을 갉아먹으며 버텼다. 은수를 밀어내고 얻어낸 것은 더 단단한 성공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 없이는 단 하루도 제 발로 서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껍데기뿐이었다.

민박집 장판 바닥에 누운 재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번져 나왔다. 8년 전 그 빗속에 홀로 버려두었던 은수의 뒷모습이, 칠흑 같은 천장의 어둠 위로 지독하게 선명한 잔상을 그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제12화. 지워진 얼굴

새벽 어스름이 푸르스름하게 방 안으로 번져갈 무렵,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박집 마당 한구석의 수돗가로 향했다.

녹슨 수도꼭지를 비틀자, 살얼음이 섞인 지하수가 쇳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으로 찬물을 가득 받아 얼굴을 틀어막았다. 살갗이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냉기가 귓바퀴를 지나 뇌수까지 단번에 찔러 들어왔다.

수돗가 옆 낡은 벽돌 벽에 기대어 세워진 깨진 거울 조각에 시선이 닿았다.

거울 속에는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자위, 면도날에 베여 거뭇하게 굳은 턱수염, 그리고 언제나 남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아래로 처져 있던 입꼬리.

어디에도 스물둘, 시집의 문장을 나누며 노을의 붉은빛에 가슴 설레어하던 청년의 얼굴은 없었다.

지난 8년간 그는 늘 누군가의 취향과 규격에 맞춰 자신을 성형해 왔다. 면접관의 마음에 들 만한 번듯하고 과장된 표정, 배달 대행 고객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기계처럼 굽히던 허리, 소개팅 앱 화면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덧씌웠던 거짓된 미소.

남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제 살점을 조금씩 베어내며 살다 보니, 정작 그 껍데기 밑바닥에 남아 있어야 할 ‘윤재희’라는 인간의 원형은 흔적도 없이 마모되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물방울이 턱 끝을 타고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재희는 거친 손바닥으로 거울 표면에 낀 성에를 거칠게 문질러 닦아냈다. 거울 속의 남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비루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형상이었지만, 적어도 그곳에는 타인의 잣대로 덧칠된 가면은 벗겨져 나가고 없었다.

산기슭 너머로 동이 터 오르며 푸른빛의 안개가 붉은 여명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쩌억 소리를 내며 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제13화. 계곡의 얼음장

아침 해는 산등성이에 걸리자마자 매서운 입김을 거두고,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서리를 은빛으로 잘게 부수어 놓았다. 마을은 흡사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 적막했고, 드문드문 세워진 슬레이트 지붕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만이 이 공간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재희는 민박집을 나와 마을 안쪽으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산기슭의 침묵을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을 끝자락, 녹슨 철망 울타리로 둘러싸인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에 문을 닫은 산골 분교였다.

운동장 부지는 잡초와 마른 억새가 가득 뒤덮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 세워진 빛바랜 철봉 위에는 녹물이 검붉게 흘러내려 있었다. 학교 건물 유리창은 먼지와 거미줄로 하얗게 흐려져 안쪽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은수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그리고 서울로 떠나기 전까지 매일 이 좁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하곤 했던 곳이었다.

재희는 울타리 철망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쇠붙이의 냉기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도시에서 자라나며 늘 콘크리트 빌딩과 아스팔트의 수직적 질서 속에 갇혀 살던 그에게, 이 황량하고 트인 산골의 공기는 기이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등수를 매기지 않고, 누군가의 잣대로 발부리를 짓누르지도 않는 대지 위에서, 세상은 비로소 본연의 넓이와 깊이로 호흡하고 있었다.

학교 현관 앞 시멘트 계단에 앉아 주머니 속에서 은수의 도서 대출 카드를 꺼내 들었다. 햇살이 카드 표면의 긁힌 자국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여기까지 와서 뭘 찾으려고.”

혼잣말처럼 뇌까린 목소리가 마른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은수를 만나 구원을 받겠다는 요량은 아니었다. 그저 벼랑 끝에 몰려 더는 숨 쉴 곳조차 없던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의 원형을 더듬어 마침내 도달한 이 끝자락에서 진정으로 마주하고 싶은 것은 타인이 아니라, 그 시절의 순수했던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산새 한 마리가 파르르 날아오르며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잔가지 소리 속에서, 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가슴 한구석이 맑고 서늘한 바람과 함께 툭 트여가는 것을 재희는 느낄 수 있었다.

제14화. 은수의 흔적

분교 뒤편, 아름드리 미루나무 아래에 지어진 단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다. 비바람에 깎여나간 나무 현판에는 '숲속마을 작은 글방'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폐교의 부속 건물을 마을 주민들과 외지 자원봉사자들이 개조해 만든 간이 도서관이었다.

녹슨 손잡이를 돌리자 끼익거리는 비명과 함께 나무문이 열렸다.

문 안쪽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니스 칠이 벗겨진 마룻바닥의 쿰쿰한 향이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족히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합판 서가 대여섯 개가 벽면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에는 기증받은 낡은 문학 전집과 어린이 동화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었다.

서가 사이를 걷는 재희의 발걸음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며 낮은 울림을 냈다.

문학 서가 맨 아랫단, 모서리가 해진 시집 코너에서 발길이 멈췄다. 낡은 하드커버 시집들의 등뼈를 손끝으로 쓸어가던 중, 낯익은 붉은색 표지의 책 한 권이 시선을 잡아챘다. 릴케의 시집이었다.

책을 꺼내 조심스레 펼쳤다. 바래서 누렇게 변한 종이 틈새, 판권지 빈 여백에 연필로 적힌 낯익은 필체가 눈에 박혔다.

'이 산골의 겨울은 길고 춥지만, 눈 속에 묻힌 씨앗은 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은수의 글씨였다. 대학 도서관 8번 서가에서 푸른색 만년필로 쪽지를 써 내려가던 바로 그 반듯하고 단단한 자음과 모음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그 흑연 자국을 더듬었다. 8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활자 속에 새겨진 온기는 마치 어제 적어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이 나고 자란 이 척박하고 외딴 골짜기에서도, 결코 세상의 비바람에 휩쓸리지 않은 채 제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책장을 덮자 뽀얀 먼지가 햇살 속으로 부옇게 피어올랐다.

재희는 가슴팍 깊은 곳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은수가 남겨둔 것은 과거의 미련이 아니었다. 어떤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스스로 피어날 수 있는 씨앗처럼, 제 본연의 생명력을 잃지 말라는 무언의 당부였다.

창틀을 넘어온 한낮의 볕이 재희의 굽은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제15화. 고립된 밤

오후 세 시를 넘기자마자 산 너머의 하늘이 납빛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골바람의 기세가 순식간에 거칠어지더니, 굵은 잿빛 눈발이 허공을 어지럽게 가르며 쏟아져 내렸다. 정선 산골의 폭설은 도심의 그것처럼 낭만적인 풍경 따위가 아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워버리며 모든 길목을 가차 없이 봉쇄해 버리는 거대한 장막이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는 이미 발목을 덮을 만큼의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덜컥거리며 돌아가던 보일러 배관에서 뻑뻑한 쇳소리가 나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형광등 불빛이 꺼졌다. 폭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산등성이의 전선이 끊겨 나간 탓이었다.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배터리 표시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안테나 칸에는 '서비스 불가능'이라는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신경망에서 완전히 잘려 나간 순간이었다.

방 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전기장판의 온기는 빠르게 식어갔고, 창호지 문틈으로 기어드는 한기가 방바닥의 냉기와 엉겨 붙었다. 재희는 패딩을 여미고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소음이 사라진 세계였다. 자동차 경적도, 배달 앱의 기계음도, 옆방 사람의 인기척도 없었다. 오직 지붕 위로 눈송이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소리와, 제 가슴속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텅 빈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지독한 고립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단절은 곧 사회적 파멸이자 낙오를 의미했다. 그러나 눈 덮인 산골의 적막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자, 그 고립은 공포가 아닌 거대한 거울이 되어 다가왔다.

타인의 시선과 끊임없는 비교, 숫자의 채찍질로 스스로를 몰아세우던 소음들이 걷히고 나자, 그 밑바닥에 오롯이 남아 있는 '자신'의 숨소리가 비로소 또렷하게 들려왔다.

밖에서는 밤새도록 눈보라가 창살을 두드렸지만, 재희는 얼어붙은 방 안에서 난생처음으로 깊고 흔들림 없는 침묵과 마주하고 있었다.

4부.

제16화. 타버린 연탄재

날이 채 밝기도 전, 마당 쪽에서 쇠붙이가 얼어붙은 바닥을 긁어대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미닫이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들이치는 찬 공기가 얼얼하게 뺨을 때렸다. 지난밤 쏟아진 폭설로 마당은 허리께까지 하얗게 묻혀 있었고, 식당에서 마주쳤던 탄가루 박힌 손의 노인이 낡은 눈삽을 쥐고 묵묵히 길을 내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노인의 허연 턱수염 위로 짙은 김이 뿜어져 나왔다.

재희는 마루 끝에 놓인 낡은 삽 하나를 집어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운동화 위로 발목까지 차가운 눈이 파고들었지만, 망설임 없이 삽날을 굳은 눈더미 속에 깊게 찔러 넣었다.

사각, 사각.

얼어붙은 눈 덩어리를 퍼 올려 길가로 던져낼 때마다 어깨와 팔마디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왔다. 서울의 원룸 안에서 마우스와 스마트폰 액정만 문지르며 곪아가던 마른 몸이, 난생처음으로 묵직한 중력의 노동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노인은 곁눈질로 땀을 뻘뻘 흘리는 재희를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제 몫의 길을 묵묵히 터나갔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눈삽이 바닥을 긁는 규칙적인 마찰음만이 새벽 산골의 적막을 기분 좋게 갈랐다.

한 시간 남짓 눈을 치워내자 마침내 대문에서 마을 어귀로 이어지는 한 줄기 검붉은 흙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눈썹 끝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등줄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손바닥은 삽자루에 쓸려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숨통은 더없이 시원하게 트였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둔탁한 통증,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빠져나가는 차가운 공기.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정직한 땀 한 방울이, 머릿속을 갉아먹던 잿빛 망념들을 씻어내며 온몸의 감각을 깨우고 있었다.

노인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재희에게 툭 내밀었다.

“……몸뚱이는 거짓말을 안 하는 법이제.”

연기 너머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겨울 아침의 붉은 볕이, 땀에 젖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제17화. 늦은 답장

제설을 마친 뒤 돌아온 방 안에는 장작 난로의 은근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재희는 가방 깊숙한 곳에서 구겨진 A4 용지 한 장과 몽당연필을 꺼내 들었다. 이력서를 인쇄하려 챙겨두었던 이면지의 하얀 뒷면. 언제나 자격증 번호와 경력 사항 따위의 건조한 규격으로 채워지던 종이였다.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을 쥐자, 굳은살 박인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8년 전 노량진의 빗속에 남겨두었던 말들, 그리고 지난 8년간 타인의 시선에 쫓기느라 제 가슴속 깊은 웅덩이에 처박아 두었던 비겁한 고백들이 흑연의 서걱거리는 소리를 타고 종이 위로 번져나갔다.

'은수야.
나는 네가 말했던 계절의 속도를 비웃으며 도망쳤었어. 남들보다 한 칸이라도 앞서지 못하면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다는 비겁한 공포 때문이었어. 너의 순수함을 견디지 못했던 건, 내 안의 밑천이 너무도 얕고 초라했기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을 때마다 묵은 죄책감의 껍질들이 하나둘 벗겨져 나갔다.

'이곳에 와서 눈을 치우고, 마른 흙먼지를 밟으며 비로소 알게 됐어. 세상이 매겨놓은 등수에서 내려와도 숨은 쉬어지고, 땀을 흘린 몸뚱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네가 씨앗이라 불렀던 그 단단한 마음을, 나 역시 내 안에서 다시 품어보려고 해.'

더 이상 긴 변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부치지 못할 편지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종이를 정갈하게 접어 은수의 도서 대출 카드 사이에 끼워 넣는 순간, 오랜 세월 가슴을 옥죄고 있던 녹슨 족쇄 하나가 비로소 툭, 소리를 내며 풀려나갔다. 그것은 지나간 첫사랑에 대한 매듭이자,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맺는 서툴지만 정직한 화해였다.

제18화. 눈 덮인 간이역

정오를 지나자 햇살은 눈부시게 부서져 내렸고, 분교 앞 철망 울타리 너머로 간이역의 녹슨 표지판이 하얗게 빛났다.

재희는 다시 숲속마을 작은 글방의 삐걱거리는 문을 열었다. 서가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볕이 공중에 떠도는 먼지 알갱이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릴케의 시집을 꺼내 판권지 사이에 자신이 꾹꾹 눌러쓴 쪽지를 가만히 끼워 넣었다.

책장을 덮으려는 찰나, 글방 안쪽의 낡은 나무 책상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매가 온화하게 휘어졌다.

“학생, 며칠 전부터 마을을 서성이던 그 청년이지요?”

“……아, 네. 잠시 머물다 가는 길입니다.”

“그 시집, 예전에 여기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아가씨가 유난히 아끼던 책인데. 3년 전쯤인가, 더 깊은 강원도 산골 분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두고 간 거예요.”

여성은 서랍에서 바랜 보리차 한 잔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떠나면서 그러더군요. 언젠가 이 책을 펼쳐볼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 사람이 오면 너무 늦지 않게 자기 몫의 봄을 찾았으면 좋겠다고요.”

재희는 두 손으로 따뜻한 찻잔을 그러쥐었다. 은수는 이미 이곳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마다 남겨둔 단단한 온기는 여전히 이 고요한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은수를 직접 마주해 미안하다는 말을 털어놓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이미 기억 속에서 원망이나 상처 대신, 묵직하고 따스한 이정표가 되어 그 자리에 오롯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창 너머로 눈 덮인 운동장이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가루가 흩날리며 허공에 은빛 파도를 그렸다. 재희는 비로소 가슴 깊은 곳에서 은수를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마음에 묻고 비로소 제 두 발로 일어서는 성숙한 작별이었다.

제19화. 단단해진 발걸음

가방을 고쳐 매고 민박집 싸릿문을 나섰다.

마을 어귀 정류장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은 새벽에 치워둔 흙길 위로 햇볕이 내려앉아 질척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낡은 운동화 앞코에 젖은 흙과 자갈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걸을 때마다 묵직한 무게감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며칠 전 도망치듯 이 골짜기로 기어들 때와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그때의 걸음이 삶의 벼랑 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던 절망의 찌꺼기였다면, 지금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단단한 대지를 딛고 선 자의 정직한 부피였다.

정류장 벤치에 짐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길가에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신발 밑창에 엉겨 붙은 흙덩이를 묵묵히 털어냈다.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는 진흙 더미 사이로 닳아 빠진 밑창의 고무 결이 드러났다.

정선으로 향하는 주황색 시외버스가 저 멀리 굽잇길을 돌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덜컹거리며 멈춰 선 버스의 차창 너머로,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면도날에 베였던 상처는 붉은 딱지가 앉아 아물어가고 있었고, 퀭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자위에는 서늘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빛이 고여 있었다.

타인의 인정과 숫자의 잣대에 목을 매달던 나약한 사내는 그곳에 없었다.

승차장 문이 열리며 낡은 압축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났다. 재희는 가방을 둘러메고 버스 계단을 밟아 올랐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울의 현실은 여전히 차갑고 비정할 것이며,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터였다. 취업의 문턱은 여전히 높을 것이고, 좁은 고시원의 공기는 여전히 메마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산골의 거친 눈보라와 노동 속에서 스스로 벼려낸 단단한 숨결 하나가, 가슴 한복판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가 속도를 높이며 정선의 산그림자를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제20화. 청춘 (靑春)

동서울터미널을 빠져나온 지하철 2호선은 굉음을 내며 한강을 가로질렀다.

차창 너머로 빽빽하게 솟은 빌딩 숲과 그 사이를 메운 자동차들의 붉은 행렬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스마트폰 화면 위로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고, 전동차 안의 공기는 수많은 타인의 피로와 무표정으로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은 여전히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고, 1초의 지체도 용납하지 않는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사람들의 숨통을 조여대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으로 걸어 나왔을 때, 회색빛 매연과 함께 흩뿌리는 가랑비가 재희의 뺨을 스쳤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밀린 카드값 결제 안내와 단기 아르바이트 구인 공고가 줄지어 떠 있었다.

재희는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가방끈을 고쳐 맸다.

통장 잔고는 여전히 바닥이었고, 당장 내일부터 머물 저렴한 거처를 찾아 발품을 팔아야 할 처지였다. 세상이 내거는 등수와 규격은 여전히 그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고,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서 또다시 무수히 넘어지고 깨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타인의 속도에 쫓겨 제 살점을 갉아먹지도 않을 것이며, 숫자로 매겨지는 평가에 영혼을 내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탄가루 묻은 손으로 쥐었던 눈삽의 무게, 릴케의 시집 갈피에 남겨진 은수의 단단한 문장, 그리고 거친 산바람 속에서 되찾은 자신의 정직한 숨결이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재희는 광장 한복판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딛는 운동화 밑창이 단단하게 바닥을 밀어냈다. 수많은 인파가 서로를 밀치며 스쳐 지나갔지만, 그의 시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차가운 빗줄기 너머로 마침내 자신만의 온전한 계절을 시작하려는 한 청춘의 푸른 숨결이, 도시의 잿빛 소음 속으로 깊고 담담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