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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OS 단편 소설

아버지와 나

부제 : 선율
제1부. 불씨의 씨앗
1장. 305호

바람은 유리창의 얇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젖은 수건의 밑동을 흔들었다. 창문 틀 구석에는 밤새 맺힌 물방울들이 좁쌀만 한 성에로 굳어 있었다. 병실 바닥에 깔린 노란 모노륨 장판은 사람의 체온을 모조리 빨아들인 듯 얼음장처럼 메말라 있었고, 복도에서 새어 나오는 소독약 냄새는 떫고 차가운 겨울 햇살의 그림자 속에 길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원은 병실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낡은 털모자를 손아귀 속에서 쥐어짰다. 남해에서 새벽 첫 완행버스를 타고 진주로, 다시 삼천포를 거쳐 도립병원으로 올라오는 다섯 시간 동안 버스 바닥의 틈새로 스며든 흙먼지가 그의 닳아 빠진 가죽구두 앞코에 허옇게 엉겨 붙어 있었다.

문앞 귀퉁이, 푸른색 플라스틱 꽂이에 삐뚤빼뚤하게 쓰인 세 글자가 눈에 박혔다.

김정희.

참으로 오랜만에 제 이름을 온전히 달고 누워 있는 아내였다. 시골집에선 그저 '일곱 남매 어미', '이장 댁'으로 불리며 자신의 성명 석 자를 부엌 아궁이 연기 속에 파묻고 살던 여인이었다.

상원은 삐걱거리는 고무 밑창 소리를 죽이며 두 번째 침대로 다가섰다. 정희는 베개에 뺨을 파묻은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일 만큼 수척해진 뺨 위로 헝클어진 머리칼 몇 가닥이 땀에 절어 붙어 있었다. 입술은 터져 핏자국이 굳어 있었으나, 홑이불 겉으로 방금 한 생명을 살점으로 떼어내 세상에 내던진 어미 특유의 억척스러운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깨우기가 안쓰러웠다. 손을 뻗어 그 마른 이마를 짚어보려다, 바깥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자신의 거친 손끝이 닿으면 살갗이 벨 것 같아 상원은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게 찔러 넣었다. 하지만 마루 끝에 옹기종기 모여 배를 주리고 있을 어린것들의 얼굴이 자꾸만 등 뒤를 잡아당겼다.

“정희야…… 정희야. 자나. 내 왔다.”

낮게 긁히는 상원의 목소리에 정희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퍼가 뻑뻑하게 열리듯 실눈 하나가 삐꼼히 떠졌다. 흐릿한 시선이 상원의 흙 묻은 바짓단을 훑고 올라와 얼굴에 닿자, 정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대 쇠 난간을 잡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 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홑이불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가만 누워 있어라, 와 일어날라 카노.”

“……애들은?”

“윤주가 밥 채리 멕이고 있다. 넷째가 야무져서 아침부텀 마당 쓸고 동생들 단속 잘하더라. 걱정 붙들어 매라.”

“애기는…… 보셨는교?”

“아즉. 차가 연착을 해갖고 인제사 내려가 볼라 칸다.”

신생아실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면회 마감 시간을 알리는 빨간색 괘종시계 추가 덜컹거리며 3시를 지나치고 있었다. 상원은 두꺼운 유리벽 앞에 섰다. 차가운 쇠 냄새가 나는 인터폰 수화기를 귀에 대자, 안쪽에서 플라스틱 바구니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젖비린내가 수화기 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얀 면 커튼이 드르륵 걷혔다. 족히 스무 개는 넘어 보이는 볏짚색 요람 바구니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간호사 하나가 포대기를 안고 걸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로 내밀어진 핏덩이. 숱 없는 검은 머리칼에 붉은 핏기가 가시지 않은 작은 얼굴이 작은 주먹을 쥐고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3.4킬로, 건강한 사내아이입니다. 산모 이름 김정희 씨 맞으시죠? 잠깐만 보시고 면회 시간 끝났으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셔야 합니다.”

유리창에 닿은 상원의 입김이 하얗게 서려 아이의 얼굴을 가렸다. 오 분 남짓한 짧은 만남. 상원은 유리창을 닦아내지도 못한 채 물러섰다. 자신의 뭉툭한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을 쏙 빼닮은 일곱 번째 아이. 기쁨보다 먼저 가슴 밑바닥을 짓누른 것은 서늘한 공포였다. 이 가혹한 시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가난한 집구석에 또 하나의 목숨이 기어들어 왔다는 공포.

병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창밖은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취침등이 하나둘 켜지며 병실 안은 옅은 주황빛과 짙은 그늘의 얼룩으로 채워졌다. 옆 침대에서는 부산서 첫차를 타고 올라왔다는 친정어머니가 딸의 거친 손을 부여잡고 연신 눈물을 훔쳐내고 있었다.

“욕봤데이…… 내 뱃속에서 나와가꼬 지 애비 닮아 가난한 꼴 못 면하고 이 고생을 한다……”

그 흐느낌이 칼날처럼 상원의 가슴을 후벼 팠다. 정희는 친정어머니는커녕 돌봐줄 피붙이 하나 없이 혼자서 이 차가운 병실 바닥을 견디고 있었다. 상원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아내의 발치를 덮은 이불깃을 가만히 여며주었다.

“고생…… 했다.”

정희는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려 벽 쪽을 바라보았다. 벽지의 누런 얼룩 사이로, 어둠이 곰팡이처럼 소리 없이 기어들고 있었다. 그 어둠은 단순한 밤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남해 바다에서부터 그들의 숨통을 죄어오며 따라붙은, 붉고 잔인한 피 냄새를 머금은 그림자였다.

* * *
2장. 뻘밭의 족적

1976년 겨울의 남해 창선면 앞바다는 유난히 물이 차고 검었다. 물이 빠져나간 뻘밭은 거대한 짐승의 썩은 내장처럼 흉흉한 비린내를 풍겼다. 마을 사람들에게 뻘은 목숨줄이었다. 바지락을 캐고 낙지를 긁어 입에 풀칠을 했고, 바다를 메워 만든 조그마한 논배미에서 나오는 나락 몇 섬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그해 겨울, 뻘밭 어귀에 낯선 쇠말뚝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상원은 갯벌 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차가운 삭풍이 귀밑을 때렸다. 바닷가 둑방길 한가운데, 검은색 털 코트를 걸친 낯선 사내 셋이 서 있었다. 그들 발치에는 붉은색 깃발이 꽂힌 말뚝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동네 토박이인 춘배 숙부가 흙투성이가 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으리들, 이러시면 안 됩니더. 여가 우리 문중이 삼대째 개간한 땅입니더. 여를 뺏기면 우리 식구들은 다 굶어 죽어예……”

“영감탱이가 귀가 먹었나? 토지개간법상 국유지로 환수된 걸 우리가 정상적으로 불하받았다고 몇 번을 말해? 서류에 도장 다 찍혀 있어. 억울하면 군청 가서 따져!”

선글라스를 낀 깍두기 머리의 사내가 춘배의 가슴팍을 군화발로 툭 걷어찼다. 춘배가 힘없이 갯벌 진흙탕 속으로 나뒹굴었다.

“멈추시오!”

상원이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달려들었다. 상원의 성난 눈빛을 본 사내들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라, 이 동네 이장 양반 오셨네. 왜, 박상원 씨도 이 갯벌에 지분 좀 있으신가?”

“동네 사람들 인감도장 몰래 빼돌려가 위임장 위조한 거, 군청 과장놈이랑 짜고 친 거 내가 다 알고 있소. 당장 이 말뚝 뽑아내시오.”

상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사내들 뒤편, 둑길에 세워진 검은색 코로나 승용차 안에서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왔다. 차 안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금테 안경을 쓴 젊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시 남해 일대 사채와 수산물 유통망을 장악해가던 조직 '장두(場頭)'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훗날 한양 인터내셔널의 회장이 될 스물여덟 살의 한병철이었다.

병철은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차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튕겨냈다.

“박 이장님.”

병철의 목소리는 바닷바람보다 서늘하고 정갈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서울에선 하루가 다르게 빌딩이 올라가고 고속도로가 뚫리는데, 이 깡촌 뻘밭에서 조개나 캐며 살 겁니까? 여기 매립해서 관광단지 짓고 도로 내면 다 이 동네 좋은 일입니다.”

“남의 피땀을 도둑질해 지은 빌딩이 얼마나 오래 가겠소? 군청에 진정서 넣을 거요. 도청이고 청와대고 다 찾아갈 테니 그리 아시오.”

상원의 결연한 태도에 병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창문을 올렸다. 검은 승용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둑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사흘 뒤, 춘배 숙부는 창선교 다리 밑 갯벌 속에서 거꾸로 처박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만취해 발을 헛디뎌 익사한 것이라며 부검도 없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것이 '장두'가 마을 사람들에게 보낸 첫 번째 경고였다.

* * *
3장. 붉은 수첩 (1976년 12월 29일)

눈은 그칠 기미 없이 쏟아져 내렸다. 남해포구의 대나무 숲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딱, 딱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상원은 윗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아내의 아파하는 거친 신음과, 핏덩이의 가녀린 울음소리를 들으며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방 안 구석의 무쇠 화롯가에는 숯검정이 된 장작개비 사이로 희미한 잔불만이 붉게 헐떡이고 있었다.

상원의 거친 손바닥 위에는 피 묻은 손때가 눅눅하게 밴 붉은 가죽 표지의 수첩이 들려 있었다. 춘배 숙부가 의문사하기 전날 밤, 피투성이가 된 채 상원의 집 뒷담을 넘어와 건네주었던 바로 그 수첩이었다.

수첩을 펼치자 곰팡내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1970년대 초부터 남해군 일대의 농토와 어장, 임야 수십만 평을 사채 빚으로 옭아매 강탈한 내역이 빼곡했다.

• 창선면 대사리 산 42번지, 농민 김판술 전답 3천 평 — 채무 불이행으로 강제 양도 (이의 제기 후 익사)

• 이동면 난음리 갯벌 매립권 — 군청 수산과 뇌물 500만 원 공여, 명의 변경 완료

• 장두(場頭) 지분 내역: 지분 60% 한병철, 행동책 장우식 20%……

이것은 단순한 장부가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들의 목을 매단 밧줄이었고, 죽은 이들의 살점이 묻은 피의 기록이었다.

“오빠…… 밖에서 복구가…… 또 짖어예……”

잠결에 깬 정희가 윗방에서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상원은 수첩을 품에 넣고 조심스레 신발을 끌며 봉당으로 나섰다. 마당 구석 감나무 밑에서 묶여 있던 누렁이 복구가 쇠사슬을 팽팽하게 당기며 대문 밖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목구멍을 긁는 소리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눈발 사이로, 과수원 돌담 너머에 검은 그림자 둘이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빛이 번뜩였다. 손에 쥔 쇠파이프가 달빛에 파르스름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놈들이 집까지 찾아온 것이다.

상원은 떨리는 손으로 부엌으로 돌아왔다. 이 장부를 들고 지금 당장 순경에게 달려간다 한들, 이미 장두의 돈에 매수된 지서장은 놈들에게 장부를 바치고 자신을 춘배 숙부 곁으로 보낼 터였다.

'내가 죽으면…… 정희와 이 일곱 것들은 어찌 되는가.'

상원은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부엌 아궁이 안쪽 깊숙한 구들장 틈새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손끝이 찢겨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상원은 붉은 수첩을 기름종이에 겹겹이 싼 뒤, 구들장을 받치고 있는 두 번째 이중 벽돌 틈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차가운 진흙을 이겨 그 틈을 단단히 메웠다.

“이 장부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 내 목숨이 끝나거나, 아니면 네놈들의 죄악이 온 천하에 불탈 것이다.”

손에 묻은 차가운 진흙을 털어내며 아궁이 구석의 꺼진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잿빛 어둠 속에 남은 실낱같은 온기마저 서럽고 참담했다.

* * *
4장. 아버지의 침묵

세월은 가난보다 빠르게 흘렀고, 어둠은 결코 집요함을 잃지 않았다. 막내 준혁이 열 살이 되던 해 여름, 정희의 집 마당에는 여전히 불안의 그림자가 서성였다.

상원은 그 10년 동안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았다. 마을 이장직을 내려놓고 입을 닫았으며, 논일과 지게질만을 묵묵히 해낼 뿐이었다. 그러나 밤마다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부엌 아궁이를 확인하곤 했다.

어느 무더운 8월의 새벽, 복구가 미친 듯이 짖어대던 날. 정희가 문을 열었을 때 마당 구석으로 스쳐 지나가던 그 차가운 사내의 실루엣.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장두의 사냥개들은 10년이 지나도록 상원이 숨겨둔 그 장부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

며칠 뒤, 상원은 마을 어귀 비탈진 논둑길 밑으로 굴러떨어진 채 발견되었다.

“상원 씨! 상원 씨, 정신 좀 차려보소!”

동네 사람들의 비명 속에 삼천포 병원으로 실려 간 상원은 온몸의 뼈가 바스러진 상태였다. 산소마스크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상원의 옷깃 뒷덜미는 거친 손아귀에 잡혀 뜯겨나간 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 위에서 그를 밀어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서울에서 연락을 받고 내려온 명주와 열 살 준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환자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상원은 이미 꺼져가는 등불이었다.

“아…… 버지……”

준혁의 작은 손이 상원의 거칠고 굳은 손을 잡았다. 상원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피발이 선 눈동자가 막내아들의 얼굴을 향했다. 상원은 마지막 남은 숨을 쥐어짜며 산소마스크 속에서 피 섞인 침을 뱉어내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준…… 혁아……”

“예, 아버지. 저 준혁이에요……”

“장두……”

상원의 손가락이 부러질 듯 준혁의 손목을 옥죄었다.

“장두한테…… 절대로…… 장부를 주지 마라…… 놈들이…… 다 죽인다……”

그것이 상원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침대 옆 모니터의 초록색 곡선이 삐- 하는 일직선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어린 준혁은 차가워지는 아버지의 시신을 붙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장두'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장부'가 무엇인지 준혁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집어삼킨 그 검은 손길이 언젠가 자신과 가족들의 목을 죄어올 것이라는 서늘한 직감만이 소년의 가슴 깊은 곳에 쐐기처럼 박혔다.

상원의 장례는 초라했다. 장례식장 바깥 어귀, 짙은 선팅을 한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삼일 내내 시동을 켠 채 상여가 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차 안에서 차갑게 번뜩이던 누군가의 시선. 그것은 상원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이어질 더 잔혹한 악연의 서막에 불과함을 알리는 침묵의 선언이었다.

상여가 나가고 난 뒤의 집안은 썰물 빠져나간 갯벌보다 적막했다.

마당 구석 감나무에 매여 있던 복구는 목이 쉬어 더는 짖지 못하고 볏짚 바닥에 턱을 묻은 채 헐떡였다. 대문 밖 길목에 삼일 밤낮을 버티고 서 있던 검은 승용차는 상여가 선산으로 올라가자마자 검은 매연을 뿜으며 읍내 쪽으로 사라졌다. 차가 머물다 간 자갈길 위에는 장우식의 패거리들이 짓밟고 간 솔담배 꽁초 대여섯 개만이 납작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봉당 마루 한가운데, 칠이 벗겨진 둥근 양은 밥상이 놓였다.

밥상 위에는 소금기만 겨우 맞춘 맑은 콩나물국 한 대접과 꽁보리밥 세 주발, 그리고 거친 고춧가루에 버무린 짠지 한 종지가 전부였다.

정희는 삼베 두건을 벗지도 않은 채 윗방 문틀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눈물조차 말라붙어 붉게 짓무른 두 눈은 텅 빈 밥상을 건너다볼 뿐 숟가락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엄니, 국 식습니더. 한 숟갈이라도 뜨소.”

넷째 윤주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국그릇을 정희의 무릎 앞으로 밀어놓았다. 겨우 열아홉 살 된 계집아이의 손마디는 상여를 따르며 흙바닥에 무릎을 꿇느라 까져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정희는 말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너거들이나 마이 무라. 내는 목구멍으로 밥알이 안 넘어간다.”

여섯째 한혁은 열두 살짜리답지 않게 입술을 꽉 다문 채 보리밥을 숟가락 가득 퍼 입에 밀어 넣었다.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한혁은 밥그릇 바닥이 긁히도록 숟가락질을 해대면서도 고개를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눈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밥주발 안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지만, 소년은 악을 쓰듯 밥을 씹어 삼켰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자신이 어미와 동생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열두 살의 한혁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준혁은 밥상을 등진 채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부엌 아궁이 틈으로 연신 후후 숨을 불어대던 누나 향주는 눈가에 메케한 연기를 핑계 삼아 눈물을 훔쳐냈다.

이내 저녁이 다된 바깥마당에 내린 8월의 빗방울이 처마를 타고 흙탕물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손목에는 아직도 아버지가 병실에서 마지막 숨을 토하며 부러뜨릴 듯 쥐었던 손자국이 검푸른 멍으로 남아 있었다.

'장두한테…… 절대로…… 장부를 주지 마라…….'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거친 숨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귓전을 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툇마루 바닥이 삐걱였다. 준혁이 고개를 들자, 낡은 꽃무늬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 큰누나 명주가 서 있었다. 동대문 평화시장 원단 가게로 돌아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신발을 꿰어 신은 참이었다. 명주는 퉁퉁 부은 눈으로 막내 준혁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준혁아.”

명주는 저고리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손수건을 꺼냈다.

네 겹으로 꽁꽁 묶은 매듭을 풀자, 그 안에서 땀과 기름 냄새가 눅진하게 밴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이 나왔다. 서울로 올라가 미싱 시다로 밤을 새우며 밥값을 아껴 모아둔 돈이었다.

“누나 서울 가믄…… 한동안 못 내려온다. 이거 쥐고 있다가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서 써라. 엄니 말 잘 듣고, 한혁이 형아 따라다니면서 딴생각 말고…… 알았제?”

명주는 준혁의 작고 거친 손바닥을 펴고 지폐 두 장을 쥐여준 뒤, 손가락을 꼭 쥐어 닫아주었다.

준혁은 돈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종이돈의 온기보다, 자신을 두고 서울로 떠나야 하는 누나의 덜덜 떨리는 손끝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누나.”

“응?”

“장두가…… 뭐 하는 사람이고?”

명주의 손길이 굳어졌다. 누나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창선교 갯벌에 거꾸로 처박혔던 춘배 영감의 시신을 보았을 때의 그 서늘한 공포였다.

“……그런 거 묻지 마라. 준혁이 니는 아무것도 알라 카지 마라.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이 징글징글한 뻘밭에서 도망칠 생각만 해라.”

명주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가방끈을 고쳐 멨다. 그리고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명주의 젖은 신발 소리가 골목길 자갈을 밟으며 멀어져 갔다.

준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손에 쥔 천 원짜리 지폐를 바지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조심스레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안은 캄캄했다. 가마솥에 엉겨 붙은 그을음 냄새와 비에 젖은 진흙 바닥의 냉기가 훅 끼쳐왔다.

준혁은 신발을 벗고 아궁이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 시절,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러 나왔을 때마다 마주했던 아버지의 굽은 등판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전깃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부엌에서, 아버지는 늘 쪼그려 앉아 아궁이 안쪽 특정 벽돌을 손끝으로 쓰다듬고 또 매만지곤 했다. 열 살의 어린 눈에는 그저 아궁이를 손질하는 줄로만 알았던 그 이상한 버릇. 하지만 임종 직전 피를 토하듯 내뱉었던 "장부를 주지 마라"는 유언과 마주한 순간, 아버지가 밤마다 지키고 서 있던 그 자리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소년은 본능처럼 깨닫고 있었다.

준혁은 무릎을 꿇고 쪼그려 앉아 손을 뻗었다. 아버지가 수없이 어루만지며 지켜내려 했던 아궁이 안쪽 구들장 밑, 차가운 진흙으로 덧발라진 두 번째 이중 벽돌의 틈새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진흙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빗물이 스며들어 축축하고 차가웠다. 벽돌 틈새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을 그 붉은 가죽 수첩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아버지.'

준혁은 아궁이 한편에 웅크려 앉아 무릎 사이에 이마를 묻었다.

아버지가 목숨과 맞바꾸며 지키려 했던 그 장부.

비열한 사채업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발밑에 짓밟혀 피를 흘리면서도 끝내 내어주지 않았던 침묵의 무게가 어린 소년의 작은 어깨 위로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명주 누나가 준 지폐가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친 여름비가 남해의 갯벌을 짓이기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제2부. 그늘진 일상
5장. 열일곱

흙탕물은 미지근했고,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개흙의 감촉은 서늘한 뱀의 혓바닥 같았다.

준혁은 걷어 올린 바짓단을 다시 한번 꽉 쥐어 묶었다. 논바닥에서 올라오는 썩은 짚 냄새와 비료 냄새가 뙤약볕 아래서 끈적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열일곱의 준혁에게 여름은 방학이나 휴식의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과, 땀에 전 등판을 내리쬐는 가혹한 태양의 계절이었다.

“준혁아!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모단이나 퍼뜩 날라라! 해 넘어가기 전에 이 배미는 다 심어야 안 되겠나!”

논두렁 위에서 어머니 정희의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상원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정희의 허리는 눈에 띄게 굽어 있었고, 거칠게 갈라진 손마디는 흙먼지가 배어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검버섯처럼 굳어 있었다. 여섯째 한혁이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 장학금을 갚기 위해 하사관으로 입대해 버린 뒤, 이 넓은 논배미의 일손은 고스란히 정희와 고등학생인 준혁의 몫으로 남겨졌다.

“예, 엄니. 갑니더.”

준혁은 볏모를 한 아름 안아 들고 발을 뗐다. 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꺼질 때마다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발목을 잡아끄는 흙탕물. 그것은 마치 이 집구석을 옭아매고 있는 가난의 무게 같았고,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남겼던 그 무겁고 어두운 유언의 늪 같았다.

'장두한테 장부를 주지 마라…….'

아버지가 숨을 거두던 날의 차가운 병실 냄새가 흙탕물 냄새 위로 겹쳐졌다. 아버지는 왜 그토록 처절하게 그 장부를 숨겼을까. 그리고 왜, 그 거대한 비밀을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막내의 손에 쥐여주고 떠났을까.

“준혁이 니, 또 딴생각하제? 넋을 놓고 있네. 얼른 심고 집에 가가꼬 꼴도 베야 한다.”

정희가 이마의 땀을 수건으로 훔치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날 선 목소리 밑바닥에는 혼자서 막내를 건사해야 한다는 어미의 막막한 공포가 깔려 있었다. 준혁은 말없이 허리를 숙여 볏모를 논바닥에 꽂아 넣었다. 손끝에 와닿는 차가운 흙의 감촉 속에서, 소년은 일찍이 세상에 공평한 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 * *
6장. 평행선

교실 창밖으로 매미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선풍기 두 대가 덜컹거리며 더운 바람을 교실 구석으로 밀어내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평소에는 다정하게 붙어 있던 책상들이 시험 대형으로 길게 줄을 지어 갈라져 있었다.

“시험지 뒤로 넘겨라. 부정행위 하다 걸리면 이번 학기 내신은 국물도 없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역사 교사의 굵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준혁은 연필을 쥐었다. 어젯밤 모깃불을 피워놓고 새벽 4시까지 손때 묻은 교과서를 파고들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차분하게 정리되어 흘러나왔다. 1번부터 13번까지 거침없이 답을 채워 내려가던 준혁의 연필심이 14번 문항 앞에서 뚝 멈춰 섰다.

14. 조선 후기 대동법(大同法)의 시행 배경과 그 결과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시오.

① 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토산물 대신 토지 결수에 따라 쌀, 베, 동전으로 징수하였다.

② 가난한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다.

③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지주들의 거센 반발로 전국적 시행에 100년이 걸렸다.

연필 끝이 파르르 떨렸다.

'토지를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이 거두고, 가난한 자의 억울함을 덜어준다…….'

교과서 속의 문장은 찬란하고 정의로웠다. 그러나 준혁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지키려 했던 마을 사람들의 땅은 힘 있는 자들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갔고, 빼앗긴 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도망쳤으며, 빼앗은 자들은 서울로 올라가 거대한 빌딩을 짓고 기업가가 되었다. 힘없는 이장의 아들인 자신은 학비 걱정에 밤잠을 설쳐야 했고, 군대로 떠난 형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진흙탕 논바닥을 기어야 했다.

시대가 바뀌고 제도가 바뀌어도, 힘을 가진 자들이 약자의 피를 빨아먹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준혁은 14번 문제의 정답에 동그라미를 치지 못한 채 멍하니 시험지를 내려다보았다. 시험이 끝난 뒤 내려다본 운동장 한편에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서성이는 하진의 옆얼굴이 햇살 속에 환하게 비쳤다.

하진은 언제나 말이 없었고, 이지적인 눈빛으로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아이였다. 마을에서 가장 번듯한 슬레이트 지붕 집의 딸이자, 서울로 올라가 큰 사업을 한다는 병철의 여동생. 준혁에게 하진은 닿을 수 없는 별과 같았다. 같은 교내, 같은 공기를 마시며 앉아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나란히, 그러나 멀찍이 비껴가고 있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시험지가 걷혔다.

“야, 박준혁! 시험 끝났는데 뭐 하냐? 덕성이랑 떡볶이 먹으러 가자!”

영식이가 다가와 어깨를 툭 쳤지만, 준혁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나 집에 가서 어머니 논에 피 뽑는 거 도와드려야 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나서는 준혁의 등 뒤로,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하진의 맑은 목소리가 바람결에 스쳐 지나갔다. 준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에 얹힌 가난과 비밀의 무게는 첫사랑의 설렘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남해의 여름 소나기는 예고 없이 바다를 건너왔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도 전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망운산 자락을 집어삼키더니, 굵은 빗방울이 교사 함석지붕을 요란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학기 마지막 시험이 끝난 뒤라 학생들은 저마다 가방을 머리에 인 채 아우성을 치며 교문을 빠져나갔다.

준혁은 낡은 신발장 구석에 꽂아두었던 비닐우산을 꺼내 들고 본관 현관으로 내려왔다. 살대 두 개가 부러져 철사로 칭칭 감아놓은, 비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금방 뒤집히는 500원짜리 투명 우산이었다.

현관 처마 밑,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낯익은 하늘색 책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학년 후배 하진이었다.

하진은 쏟아지는 장대비를 바라보며 젖어드는 교복 치맛단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아침에 빗어 넘겼을 단발머리 끝에 빗물이 튀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서울서 큰 사업을 한다는 오빠를 둔 마을 부잣집 딸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소나기 앞에서는 그저 비를 피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하진아.”

준혁의 나지막한 부름에 하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어? 오빠~.”

하진의 맑은 눈동자가 준혁의 닳아 빠진 운동화와 손에 든 낡은 비닐우산을 훑었다.

준혁은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빗물 고인 운동장 쪽으로 던졌다. 전교생이 다 아는 가난한 이장의 막내아들. 집안의 모든 땅을 빼앗기고 아버지를 잃은 뒤, 흙탕물 논바닥을 기며 살아야 하는 자신과 하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아득한 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빗물에 젖어 파리해진 후배의 어깨를 모른 척 지나칠 수는 없었다.

“우산…… 없나?”

“네. 아침엔 해가 쨍쨍해서 그냥 왔는데…… 금방 그칠 줄 알았더니 더 많이 오네요.”

하진이 곤란한 듯 배시시 웃었다.

준혁은 말없이 손에 쥐고 있던 비닐우산을 하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쓰고 가라.”

“네? 하지만 오빠는요? 집도 바닷가 쪽이라 멀잖아요.”

“나는…… 남아서 교실 청소도 더 해야 하고, 비 좀 맞아도 상관없다. 넌 감기 걸린다. 얼른 쓰고 가.”

준혁은 하진이 미처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우산 손잡이를 그녀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찰나였지만 손끝에 와닿은 하진의 살갗은 차가운 빗물과 달리 작고 따뜻했다.

“오빠! 잠깐만요—”

하진의 부름을 뒤로하고, 준혁은 가방을 가슴에 품은 채 장대비가 쏟아지는 운동장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쏴아아—

차가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머리칼과 교복 셔츠를 적셨다. 등판에 쩍쩍 달라붙는 옷감 너머로 한기가 파고들었지만, 빗속을 내달리는 준혁의 심장은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요동쳤다. 뒤를 돌아보면 하진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소년은 앞만 보며 갯벌 둑길을 향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다음 날 아침, 비는 씻은 듯이 개어 있었고 교정의 은행나무 잎은 투명한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준혁이 교실 문을 열고 자기 책상으로 다가섰을 때, 책상 서랍 안쪽에 낯선 물건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어제 건네주었던 그 낡은 비닐우산이었다.

부러진 살대 자리에 감아두었던 녹슨 철사 위로, 정갈한 주름이 잡힌 연분홍빛 면 손수건이 얌전하게 묶여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 매듭 틈새에는 노란색 셀로판지로 싸인 알사탕 하나와 반듯한 글씨의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오빠,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비 안 맞고 잘 들어갔어요. 우산 손잡이가 거칠어서 손 베일까 봐 손수건 묶어두었어요. - 한하진]

준혁은 멍하니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닷바람에 손수건 자락이 가볍게 흔들리며 은은한 비누 냄새를 풍겼다.

소년은 알사탕을 집어 들지 못했다. 깨끗하게 빨아 다린 손수건의 감촉을 거친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매만질 뿐이었다.

그 손수건과 사탕 한 알은, 훗날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르고 서울의 차가운 지하 자취방에서 모든 진실의 어둠과 마주하게 될 때까지도 준혁의 3단 철제 서랍장 가장 깊은 곳에 고스란히 간직되는 유일한 햇살이 되었다.

* * *
7장. 첫 번째 단서

세월은 2000년대로 접어들며 아날로그의 흔적들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준혁은 지방 국립대 컴퓨터공학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의 작은 시스템 보안 솔루션 업체에 취직했다. 낡은 단칸방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밤낮없이 C언어와 네트워크 프로그래밍에 매달렸다. 흙을 파먹고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함,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내 손으로 파헤치겠다는 집념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연료였다.

서른을 바라보던 어느 가을밤, 준혁은 고향 시골집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낡은 상자 하나를 서울 자취방으로 가져왔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들이었다. 빛바랜 이장 도장, 낡은 수첩 몇 권, 그리고 준혁이 태어나던 1976년 겨울의 신문 스크랩들.

준혁은 회사의 서버 분석 툴과 공공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과거 남해군 일대의 토지 대장과 법인 등기부등본을 대조하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초록색 텍스트들이 쉼 없이 스크롤 되었다.

[QUERY: 1976-1980 NAMHAE-GUN LAND REGISTRY TRANSACTION LOGS]

화면에 떠오른 데이터들은 경악스러웠다. 1976년부터 1982년 사이, 창선면 대사리와 이동면 일대의 전답 및 임야 수십만 평이 특정 수산업체로 헐값에 매매된 뒤, 1988년 '한양주택개발'이라는 법인으로 일괄 흡수 합병된 기록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한양주택개발의 대표이사 명단.

한병철.

모니터의 푸른 빛을 받고 있는 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한병철. 그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 익숙해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 교정에서 늘 가슴속에 품고만 있었던 아이, 언젠가 어른이 되면 당당하게 다가가고 싶었던 하진의 친오빠이자, 고향 마을의 자랑거리라며 칭송받던 그 성공한 사업가.

'어째서…… 왜 하진이의 오빠가…….'

아버지가 임종 직전 산소마스크 속에서 피를 토하듯 내뱉었던 '장두'라는 단어. 그것은 동네 삼촌의 이름이 아니라, 한병철이 70년대 남해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사채업자들과 폭력배들을 규합해 만든 사조직의 명칭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어 죽게 만든 원수의 피가, 자신이 평생을 마음에 품어온 여인의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

준혁은 머리를 감싸 쥐고 책상 위로 엎어졌다. 구토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진실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것을. 세상이 통째로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준혁의 낡은 휴대전화가 짧은 진동을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준혁의 손가락이 굳어졌다.

[하진]
'오빠, 나 이번에 서울로 이직했어. 강남 쪽인데 시간 되면 밥 한번 먹자.'

액정 화면에 뜬 하진의 문자메시지가 잔인한 비수처럼 준혁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화면의 불빛 뒤로, 아주 오래전 병실 창가에서부터 자신을 집어삼키려 다가오던 그 검은 그늘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배동 골목 안쪽, 낡은 다세대주택 반지하 방의 벽면은 언제나 눅눅한 곰팡내와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머금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 낡은 조립식 컴퓨터 본체에서는 쉼 없이 쿨러가 웅웅거리는 쇳소리를 뿜어냈다. 준혁은 모니터의 시퍼런 불빛에 눈을 찌푸리며, 불려 먹던 컵라면 용기를 책상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과거 남해군청 지적 전산망에서 스크래핑한 1970년대 후반의 등기부 원장들과, 최근 강남의 거대 시행사로 떠오른 '한양 인터내셔널'의 지분 구조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ANALYSIS COMPLETE]
1976-12 : NAMHAE CHANGSEON PARCEL 42 -> ACQUIRED BY 'JANG-DU' (CEO: HAN BYUNG-CHUL)
1988-04 : MERGED INTO HANYANG HOUSING DEV.
2005-11 : CURRENT ENTITY 'HANYANG INTERNATIONAL' - CHAIR: HAN BYUNG-CHUL
    

준혁의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짚은 채 모니터를 노려보던 그의 시선이 '한병철'이라는 세 글자에서 굳어졌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남겼던 그 저주받은 이름 '장두'.

그것은 동네 사채 폭력배의 별명이 아니라, 창선면 일대의 갯벌과 농토를 빼앗고 춘배 숙부와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던 거대 기업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살인과 찬탈의 왕국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자는, 다름 아닌 하진의 친오빠 한병철이었다.

“……어째서.”

준혁은 머리를 감싸 쥐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위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넘어왔다.

중학교 시절 비 내리던 하굣길 처마 밑에서 건넸던 비닐우산, 낡은 철사 위에 얌전하게 묶여 있던 연분홍빛 손수건과 알사탕 한 알의 기억.

그 순결했던 첫사랑의 잔상 위로, 1976년 겨울 갯벌 둑길에 검은 승용차를 세워두고 춘배 영감의 손등을 짓밟으라 명령하던 한병철의 서늘한 금테 안경이 겹쳐졌다.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피가, 자신이 평생을 마음에 품어온 여인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다.

'너를 원망해야 하는가, 아니면 너를 품은 내 심장을 도려내야 하는가.'

삐-빅.

정적을 찢고 낡은 슬라이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준혁은 떨리는 손으로 폴더를 열었다. 액정 화면에 뜬 발신인은 '하진'이었다.

[하진]
'오빠! 나 이번에 강남 쪽 외국계 회사로 이직 확정됐어! 다음 주부터 서울 출근해. 올라가면 우리 진짜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살게!'

문자메시지의 느낌표 하나하나가 칼날이 되어 준혁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세상은 잔인하도록 정밀하게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하진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 누리는 풍요와 성공의 뿌리가 남해 갯벌에 거꾸로 처박혀 죽어간 이웃들의 핏값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저토록 천진한 아이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준혁은 휴대전화를 쥔 손을 바들바들 떨며 반지하 방의 차가운 시멘트 벽에 머리를 기댔다.

차라리 이 진실을 몰랐더라면, 평생 가난뱅이 엔지니어로 썩어가더라도 하진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었을 것을.

준혁은 낡은 3단 철제 서랍을 열었다.

그 좁고 어두운 이중 바닥 틈새 깊숙한 곳, 십수 년 전 하진이 건네주었던 빛바랜 연분홍 손수건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준혁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파묻었다.

손수건에선 더 이상 비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소년 준혁의 가슴을 뛰게 했던 그 유일한 온기만은 서늘한 반지하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하진아. 너는 결백해야 한다. 이 추악한 죄악의 늪은 내가 온전히 짊어지고 끝낼 테니, 너는 끝까지 햇살 아래서만 살아라.'

준혁은 눈물을 닦아내며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화면 속, 아버지가 남긴 붉은 장부를 영구히 박제할 암호화 분산 파일 시스템의 첫 번째 소스 코드가 타이핑되기 시작했다.

* * *
8장. 강남역에서

2010년 7월, 강남역 8번 출구 앞의 공기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덥고 습했다. 유리 빌딩들이 뿜어내는 에어컨 실외기 열기 속에서, 준혁은 편의점 앞 차양 밑에 서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저 멀리 횡단보도 너머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하진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럽으로 한 달간의 긴 여행을 떠나기 전, 굳이 자신을 보고 가겠다며 회사 앞까지 찾아온 하진이었다.

“오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하진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웃음이 가득했다. 그 맑은 눈동자 어디에도 오빠 한병철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의 그림자는 묻어 있지 않았다. 준혁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하진의 어깨에서 천근만근 같은 배낭을 낚아채듯 받아 메었다.

“와…… 배낭이 왜 이리 무겁냐. 돌덩이라도 넣었어?”

“오빠 주려고 남해 본가에서 엄마가 보내준 멸치볶음이랑 밑반찬 좀 챙겼지. 나 유럽 가 있는 동안 밥 잘 챙겨 먹으라고.”

골목 안쪽 커피숍 구석 자리,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유리잔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둥근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빠, 나 유럽 갔다 올 때까지 딴 여자한테 눈돌리면 안 된다? 나 없음 심심해서 어쩔래?”

하진은 특유의 장난기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준혁은 그 미소를 가만히 응시했다.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준혁은 단 한 번도 하진을 원망할 수 없었다. 하진은 가해자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오빠의 추악한 가면 뒤에 가려진 거대한 비극의 또 다른 희생양일 뿐이었다.

'하진아…… 너는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 끝까지 맑은 채로 살아가야 해.'

준혁은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맺혔다.

“잘 다녀와라. 소매치기 조심하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알았어, 잔소리는. 갔다 와서 진짜 맛있는 거 사줘!”

배웅을 마치고 돌아선 강남역 사거리, 짙은 선팅을 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천천히 준혁의 등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백미러 속에서 번뜩이는 운전자의 눈빛. 그것은 보령 여행 때부터, 아니 1976년 남해의 그 눈 내리던 밤부터 그들 가문의 목숨을 노려온 장두의 사냥개들이었다. 준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종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제3부. 사각(死角)의 그물망
9장. 흑막

서해안고속도로의 잿빛 아스팔트는 여름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집어삼키고 아지랑이를 아지랑이답지 않게, 끈적하고 탁한 열기로 피워 올리고 있었다. 차 안의 에어컨 송풍구는 최대로 돌아가며 차가운 쇳소리를 냈지만, 준혁의 린넨 셔츠 등판은 축축하게 젖어 운전석 시트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는 룸미러를 보는 척하며 왼쪽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떨구었다.

세 대쯤 뒤쪽 2차선, 번호판 주위가 진흙으로 희미하게 덮인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보였다.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때부터 단 한 번도 추월선을 타지 않고, 그렇다고 뒤로 처지지도 않은 채 딱 시속 100킬로미터의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는 차였다.

“준혁아, 에어컨 온도 좀 더 낮춰봐라. 이 차는 가스가 다 샜나, 와 이리 덥노.”

조수석에 앉은 용두가 목덜미를 굵은 손가락으로 긁어대며 시트를 뒤로 젖혔다. 헐렁한 반소매 티셔츠 소매 끝으로 꿈틀거리는 푸른빛 잉크의 문신 자국이 언뜻 드러났다.

“다 내린 거야. 엔진 열 받아서 그래.”

준혁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계기판의 RPM 바늘을 응시했다. 용두. 고향 창선면에서 콧물 흘리며 함께 자란 동창이자, 언제나 사람 좋은 넉살로 모임의 분위기를 띄우던 친구. 하지만 준혁은 지난달, 아버지의 유품인 옛 토지대장 필사본과 공공 전산망을 대조하던 중 지워지지 않는 붉은 핏자국 하나를 발견했었다. 1976년 당시 '장두(場頭)'라는 사채·폭력 조직의 하수인이자 토지 강탈의 행동대장이었던 자의 이름은 장우식. 바로 용두의 친아버지였다.

용두가 서울로 올라와 한양 인터내셔널의 용역 하청 업체를 차리고 준혁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용두는 20년 전 아버지가 상원에게서 빼앗지 못한 그 마지막 '장부'의 행방을 쫓아, 상원의 막내아들인 준혁의 목에 방울을 달아둔 사냥개였다. 이번 1박 2일 보령 여행은 친구들의 오랜만의 나들이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준혁에게는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의 장력을 확인하기 위한 위험한 미끼였다.

'용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어디까지 보고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 자취방을 언제 뒤질지 확인해야 한다.'

대천 IC를 빠져나와 펜션 진입로로 들어섰을 때, 시계는 정오를 훌쩍 넘겨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섞인 눅눅한 갯바람이 차창 틈으로 밀려들었다. 준혁은 자갈이 깔린 펜션 마당의 주차 구역으로 차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바닥에 흰 페인트 대신 굵은 노란색 페인트로 그어놓은 사각의 주차선.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체는 사각선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앞바퀴 한쪽이 선 밖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왔다.

기어를 P에 놓고 시동을 껐지만, 준혁은 운전대를 잡은 손을 쉽게 풀지 못했다. 선을 넘지 않으려는 발버둥, 그러나 이미 보이지 않는 사각의 틀 밖으로 밀려나 벼랑 끝에 서 있는 자신의 삶. 차창 밖으로 드리운 펜션 건물의 검은 그늘이 노란 주차선 위로 길게 내려앉았다.

“야! 드디어 왔다!”

뒤따라온 승용차에서 문이 열리며 혜선과 하진이 내렸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하진의 뺨이 한여름 햇살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진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며 특유의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 우리 짐 풀고 빨리 게장 먹으러 가자!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소개팅 나가냐? 바닷가 오면서 뭔 원피스를 그리 하늘하늘한 걸 입고 왔어, 기집애가.”

혜선이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었다. 하하 호호, 마당 가득 퍼져나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 공기는 잔칫날처럼 투명하고 화사했다.

그러나 준혁의 시선은 마당 구석,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평상 쪽에 멈추어 있었다. 용두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귀에 바짝 댄 채, 평상 뒤편의 잣나무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며 낮게 지껄이고 있었다.

“예, 전무님. 박준혁이 데리고 보령 도착했습니다. 1박 2일 동안 발 묶어둘 테니, 애들 보내서 방배동 원룸 서랍장 싹 털어보라 하십시오. 어디 숨겨놨는지 이번엔 꼭 찾아내야 합니다.”

용두의 시선이 돌아서며 준혁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용두는 순간 흠칫했으나,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손을 흔들었다.

“준혁아! 뭐 하노, 짐 안 내리고!”

준혁은 묵묵히 트렁크를 열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서울 자취방의 서랍함은 이미 비워두었다. 진짜 장부는 지금 이곳도, 서울도 아닌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준혁은 하진의 밝은 미소를 건너다보았다. 저 맑은 눈동자 뒤에 얽혀 있는 잔혹한 혈연의 사슬. 준혁은 다가올 밤의 정적 속에서, 자신이 홀로 감당해야 할 마지막 시스템의 코드를 머릿속으로 조용히 조립하기 시작했다.

* * *
10장. 로그(Log)

보령에서 돌아온 뒤의 서울은 숨이 턱 막히는 열대야에 갇혀 있었다. 방배동 골목 안쪽, 낡은 다세대주택 반지하 방의 모니터 세 대가 뿜어내는 푸른빛만이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준혁은 마시다 만 미지근한 캔커피를 들이켜며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타탁, 정적을 깨는 기계식 키보드의 타건음이 불규칙한 심장 박동처럼 방 안을 울렸다.

화면 위로는 복잡한 리눅스(Linux) 터미널 창과 C언어 소스 코드가 쉴 새 없이 스크롤 되었다.

#include <stdio.h>
#include <sys/socket.h>
#include <time.h>

// DAEMON PROCESS : LAST RESORT TRIGGER
void heartbeat_daemon() {
    int miss_count = 0;
    while(1) {
        if (!check_terminal_signal(TERMINAL_ID_JH)) {
            miss_count++;
            if (miss_count >= TIMEOUT_72HRS) {
                trigger_data_pipeline();
                break;
            }
        } else {
            miss_count = 0;
        }
        sleep(10); // 10-second ping frequency
    }
}
    

준혁은 화면 속의 주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평범한 IT 회사의 백엔드 서버 엔지니어였지만, 지난 반년 동안 그가 구축해 온 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자신의 물리적 신체가 소멸했을 때 비로소 작동하도록 설계된, 가장 차갑고 치밀한 '사후 디지털 방화벽'이었다.

1976년, 아버지 상원이 아궁이 이중 벽돌 사이에 묻어두었던 붉은 가죽 수첩의 모든 페이지는 고해상도로 스캔되어 암호화 분산 파일 시스템(IPFS)과 준혁의 개인 서버에 탑재되어 있었다.

• 조건 A: 준혁의 개인 휴대 단말기에서 송출되는 고유 주파수 핑(Ping) 신호가 72시간 이상 중단될 경우 — 혜선의 기자실 이메일과 서울중앙지검 제보 시스템으로 암호화 해독 키 1차 전송.

• 조건 B: 남해 삼천포 선창 창고 3호의 전자 패드 잠금장치가 열린 후, 현장 단말기와의 동기화 신호가 30초 이상 유지될 경우 — 장우식과 한병철의 30년간의 녹취 파일 및 원본 장부 전체 언론사 릴리즈.

“삐빅.”

단말기 상단의 붉은색 칩셋에서 조그마한 LED 불빛이 10초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점멸했다. 준혁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책상 한구석, 유리 테이프로 조잡하게 붙여놓은 옛날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창선중학교 졸업식 날, 교정 화단 구석에서 동네 친구들과 찍은 단체 사진. 그 사진의 맨 뒷줄,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녀 하진의 모습.

그 아이는 몰라야 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채업자 '장두'의 실소유주이자, 지금도 남해의 피 묻은 땅 위에 호텔과 골프장을 올리려 하는 거대 기업 한양 인터내셔널의 회장이 자신의 친오빠 한병철이라는 사실을. 하진이 그 잔혹한 진실의 무게를 짊어지고 평생을 죄책감의 감옥 속에서 살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모든 것을 안고 끝내야 한다.'

준혁은 서랍을 열었다. 지난주 보령 여행 중 장두의 패거리들이 몰래 들어와 쑤셔놓았던 서랍. 놈들은 가짜 서류철만 훔쳐 달아났지만, 곧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들이닥칠 터였다. 준혁은 낡은 3단 철제 서랍의 제일 밑바닥, 얇은 이중 합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좁은 틈새에, 하진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와 시스템 접속 포트가 적힌 메모를 밀어 넣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니터 화면 속, 10초마다 깜빡이는 초록색 로그 창의 커서가 마치 자신의 남은 수명을 갉아먹는 시계추처럼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LOG 2010-09-20 03:14:22] PING OK.
[LOG 2010-09-20 03:14:32] PING OK.
[LOG 2010-09-20 03:14:42] PING OK...
    

백화점 앞 분수대 벤치에서 하진을 만나기 일주일 전,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한 심야 시외버스는 자정을 훌쩍 넘겨 삼천포 시외버스터미널의 텅 빈 아스팔트 바닥에 준혁을 내려놓았다.

가을의 문턱이었지만 남해안의 밤공기는 눅눅하고 서늘했다.

준혁은 낡은 검은색 등산 배낭을 어깨에 고쳐 메고,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포구 길을 따라 걸었다. 배낭 안쪽 깊숙한 곳에는 고향 집 무너진 아궁이 구들장 밑에서 34년 만에 파내 온 아버지의 붉은 가죽 수첩 원본과, 방배동 자취방에서 납땜해 만든 리눅스 기반의 초소형 임베디드 통신 단말기가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삼천포 옛 선창가 방파제 끝자락.

폐선들이 녹슨 닻을 내린 채 웅크리고 있는 어둠 너머로,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이 흉측하게 주저앉은 '대사리 산 42번지'의 3호 폐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34년 전, 춘배 숙부가 억울하게 수장되고 아버지 상원이 장우식 일당에게 협박을 당하며 지켜내려 했던 바로 그 땅의 귀퉁이였다.

끼이익—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내와 마른 가마니 썩은 냄새, 그리고 짠 바닷소금 냄새가 훅 끼쳐왔다.

준혁은 미니 손전등을 입에 물고 창고 구석에 버려져 있던 거대한 목재 궤짝으로 다가갔다. 거미줄을 털어내고 뚜껑을 열자 바닥에 1976년 12월의 빛바랜 신문지 뭉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준혁은 배낭에서 기름종이에 겹겹이 싼 붉은 수첩을 꺼냈다.

표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아버지의 거친 손때와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 장부.

그 장부의 맨 뒷장에는 여전히 한병철이라는 원수의 도장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준혁은 수첩을 목재 궤짝 깊숙한 곳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신문지 뭉치로 덮었다.

그리고 창고 철문 안쪽, 비바람을 피해 벽면 배전함 뒤편에 숨겨둔 단말기 통신 포트에 랜선과 배터리 팩을 연결했다. 단말기 액정에 파란색 부팅 로그가 떠올랐다.

[SYSTEM: NAMHAE_NODE_03 INITIALIZED]
TARGET_IP: BAEGBANG_MAIN_SERVER (211.234.xx.xx)
DEFAULT STATUS: STANDBY / LOCKED
SET AUTHORIZATION PIN: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커서가 깜빡였다.

준혁은 키패드 위에 떨리는 손가락을 올렸다.

아버지의 기일도, 자신의 생일도 아니었다.

비 내리던 중학교 교정 처마 밑에서 낡은 우산을 건넸을 때, 다음 날 우산 손잡이에 연분홍 손수건과 알사탕을 묶어두었던 소녀의 생일.

평생을 가슴에 품었으나 원수의 핏줄이라는 잔혹한 사슬 앞에 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이름, 하진의 생일.

0 8 1 6 #

“삐-빅.”

녹색 불빛이 점등되며 시스템이 잠겼다.

만약 자신이 살해당하고 72시간 동안 핑 신호가 끊긴다면, 하진이 이 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원본 장부를 꺼내는 그 30초의 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언론과 검찰청 서버로 한병철의 30년 비리가 폭로되도록 설계된 덫이었다.

준혁은 무릎을 꿇고 궤짝 앞에 이마를 대었다.

'아버지. 34년 전 아버지가 품으셨던 그 침묵의 짐을, 이제 제 손으로 끝내겠습니다.'

창고 틈새로 불어온 서늘한 갯바람이 준혁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던져 하진을 지켜내고 가문의 원수를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한 청년의 가장 고독하고 처절한 마지막 봉인이었다.

* * *
11장. 2010년 9월 23일, 오렌지 주스

가을 하늘은 잔인할 만큼 티 없이 맑았다. 서울 태무 백화점 앞 광장 분수대 주변은 쇼핑백을 든 사람들과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들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벤치에 앉은 준혁의 손에는 투박한 유리병에 담긴 델몬트 오렌지 주스 한 병이 쥐어져 있었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면바지 무릎 위로 짙은 얼룩을 만들었다.

준혁은 무릎 위의 주스 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병 밑바닥의 둥근 테두리 안쪽, 흰색 종이 라벨 틈새를 핀셋으로 살짝 들어 올려 0.3밀리미터짜리 초미세 유성펜으로 빽빽하게 눌러쓴 좌표와 비밀번호.

[남해군 창선면 대사리 산 42번지, 삼천포 옛 선창 창고 3호 / 0816#]

34년 전, 아버지가 피 묻은 손으로 화롯가 구들장 밑에 묻어두었던 붉은 가죽 수첩의 원본이 보관된 장소였다. 그리고 그 비밀번호 0816#은, 준혁이 고등학교 시절 하진의 생일(8월 16일)을 남몰래 수첩 귀퉁이에 적어두었던 바로 그 숫자였다.

“오빠!”

맑고 높은 목소리가 광장의 소음을 뚫고 건너왔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하진이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사뿐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발머리가 가을바람에 가볍게 흩날렸고, 햇살을 받은 얼굴에는 티 없는 웃음이 번져 있었다.

준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심장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으며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었다. 저 맑은 눈동자, 남해 바다의 파도 소리를 닮은 깨끗한 웃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원수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준혁은 단 한 번도 하진을 증오할 수 없었다. 하진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녀는 이 추악한 악연의 가장자리에서 홀로 결백하게 피어난 한 떨기 꽃에 불과했다.

“오래 기다렸지? 백화점 지하 매장에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아니, 방금 왔어.”

준혁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려다 말고, 손에 쥐고 있던 차가운 오렌지 주스 병을 하진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목마를까 봐. 가져왔어.”

“어? 웬 옛날 유리병 주스야? 요즘 이거 구하기도 힘들 텐데.”

하진은 신기한 듯 주스 병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배시시 웃었다.

“오빠, 나 유럽 여행 갔을 때 보내준 사진 봤어? 파리 에펠탑 앞에서 찍은 거. 오빠 생각이 제일 많이 나더라. 같이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고.”

준혁은 대답 대신 하진의 옆얼굴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주스 병을 건네던 그의 셔츠 소매 아래로, 지난밤 장두의 끄나풀들이 들이닥쳐 몸싸움을 벌이다 긁힌 붉은 상처 자국이 숨겨져 있었다.

“하진아.”

“응?”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나를, 오늘을 기억해줘.”

하진의 손길이 멈추었다. 하진은 고개를 돌려 준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준혁의 눈동자 깊은 곳에 드리운 그늘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고 서늘한 심연 같았다.

“오빠, 오늘따라 왜 그래? 꼭 어디 멀리 떠나는 사람처럼 이상한 말을 하고 그래.”

“그냥. 네가 참…… 예뻐서.”

준혁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하진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손끝에 와닿는 살갗의 온기.

'이것으로 되었다. 너는 이 저주받은 악연의 진실을 모른 채, 평생 따뜻한 세상에서 웃으며 살아가야 한다.'

길 건너편, 짙은 선팅을 한 검은색 세단 안에서 망원렌즈의 셔터 소리가 번뜩이며 두 사람의 모습을 찍어내고 있었다. 준혁은 그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하진과 준혁의 마지막 가을날이었다.

* * *
12장. 검은 고리

2010년 9월 28일 새벽 2시. 방배동 반지하 자취방의 창유리를 때리는 빗줄기는 거칠고 사나웠다. 방 안에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살이 부딪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퍽!”

준혁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며 입술 터진 자리에서 붉은 피가 모니터 자판 위로 튀었다. 양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무릎을 꿇린 준혁의 등 뒤에서, 용두가 손에 쥔 날카로운 금속제 송곳으로 준혁의 쇄골 언저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박준혁이. 마지막 기회다. 1976년 수첩 원본, 그리고 지난달 네가 남해 시골집에서 파내 간 그 장부 어디다 숨겼냐?”

용두의 눈은 핏발이 서려 번들거렸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뜯겨나가 박살 난 3단 철제 서랍장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 용두야.”

준혁은 거칠게 피를 뱉어내며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네 아버지가 한병철 밑에서 평생 사냥개 짓 하다가…… 말년에 암 걸려 죽을 때 병원비 한 푼 못 받고 버려진 거 잊었냐? 너도…… 결국 똑같이 버려질 거다.”

“이 개새끼가!”

용두의 주먹이 준혁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준혁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용두는 숨을 헐떡이며 뒤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내 둘에게 턱짓을 했다. 사내들의 손에는 이미 굵은 나일론 로프가 들려 있었다.

“더 끌 거 없다. 한 회장님이 오늘 밤 안으로 무조건 자살로 마무리지으라고 하셨다. 서랍 털어도 안 나오는 거 보면, 딴 데 숨긴 게 분명해. 입부터 영원히 틀어막아.”

사내들이 달려들어 준혁의 목덜미를 억센 손아귀로 내리눌렀다. 뒷목의 경동맥이 강하게 압박당하며 뇌로 가는 피가 차단되었다. 푸르스름한 피멍이 준혁의 살갗 아래로 번져나갔다.

준혁은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바지 주머니 속에 은밀하게 숨겨둔 초소형 단말기의 사이드 버튼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세 번 연속 꾹 눌렀다.

[ALERT: TERMINAL TRIGGERED / COUNTDOWN 72:00:00 START]

천장의 낡은 형광등 고리에 굵은 로프가 걸렸다. 사내들이 축 늘어진 준혁의 몸을 의자 위에 세우고,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숨이 턱 막히며 허파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암흑으로 뒤덮이는 찰나, 준혁의 눈앞에 34년 전 아버지가 병실에서 보았을 그 사각의 그늘과, 백화점 앞 벤치에서 환하게 웃던 하진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하진아…… 부디, 용서해라.'

쿵.

의자가 바닥으로 차여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용두는 축 늘어진 준혁의 발끝을 서늘한 눈으로 확인한 뒤, 창틀을 통해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 안에는 오직 멈추지 않는 모니터 화면의 초록색 커서만이, 10초 간격으로 죽은 자의 마지막 핑(Ping) 신호를 허공으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제4부. 사투의 끝
13장. 찢겨진 폴리스 라인과 이중 서랍

장례가 치러진 지 사흘 뒤의 방배동 골목길. 노란색 경찰 통제선이 비바람에 찢겨 문고리에 을씨년스럽게 얽혀 있었다. 하진은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채 어깨를 떨었다. 그 곁에서 기자 혜선이 조용히 하진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하진아, 마음 단단히 먹어. 우리가 진실을 밝혀내지 않으면 준혁이 오빠는 영원히 '우울증에 걸려 목을 맨 패배자'로 남게 돼.”

끼이익. 문이 열리자 썰렁한 냉기와 함께 묵은 종이 냄새, 그리고 희미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방 안은 처참했다. 책상 위의 컴퓨터 본체는 하드디스크가 강제로 뜯겨나가 있었고, 옷가지와 서적들이 바닥에 짓밟혀 있었다.

탐사기자 혜선은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끼며 방 안의 흔적들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경찰 발표가 완전히 틀렸어. 자살하려는 사람이 자기 방 서랍을 송곳으로 뜯어발기진 않아. 봐, 서랍 번호판 주변이 쇠붙이로 짓이겨져 있잖아.”

하진은 무릎을 꿇고 책상 밑에 내팽개쳐진 3단 철제 서랍함으로 다가갔다. 서랍장 바닥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하진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준혁의 습성을 떠올렸다. 준혁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평범하고 낡은 곳 깊숙이 숨겨두는 사람이었다.

하진은 서랍함 내부의 벽면과 바닥 합판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왼쪽 모서리의 두께가 오른쪽보다 미세하게 2밀리미터 정도 두꺼웠다. 손톱을 틈새로 밀어 넣고 힘을 주어 젖히자, 얇은 이중 합판이 삐걱거리며 튀어 올랐다. 그 안쪽의 은밀한 공간에서, 기름종이에 싸인 준혁의 친필 시스템 일지 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혜선이 손전등을 비추었고,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2010년 8월 12일의 기록]

보령 펜션 여행을 가던 날, 주차장 노란선 넘어 차를 댈 때부터 나를 쫓던 검은 승용차가 있었다.

그 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1980년대 초에도 우리 동네 어귀에 서 있던 차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전, 내 손을 잡고 산소마스크 안에서 바르르 떨며 내뱉은 단어 하나.

'장두.. 장두한테 장부를 주지 마라..'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1976년 시골 마을 일대의 토지를 수탈하고 사람들을 수장시켰던 사채 조직의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가난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그 장부를 품에 안고 30년을 버티다 그들에게 밀려 살해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놈들의 송곳이 나를 향하고 있다.

하진이에게 건넨 오렌지 주스 병 밑바닥에, 내가 찾은 진짜 장부의 보관소 비밀번호를 기록해 두었다.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글씨는 거기서 피 묻은 지문과 함께 뚝 끊겨 있었다.

“오렌지 주스 병……!”

하진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노트 위로 떨어졌다. 9월 23일, 그 햇살 가득했던 벤치 위에서 준혁이 떨리는 손으로 쥐여주었던 차가운 주스 병. 그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34년 동안 이어진 피의 악연을 끝내기 위해, 준혁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맡긴 최후의 열쇠였다.

* * *
14장. 백색 테러

“하진아! 그 주스 병, 회사 서랍에 그대로 뒀다고 했지? 지금 당장 찾아야 해!”

혜선의 다급한 외침에 하진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하진은 택시를 타고 강남의 직장으로 가 주스 병을 챙기기로 했고, 혜선은 기자 신분증을 활용해 백화점 앞 상가 CCTV와 당시 주변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들의 블랙박스를 탐문하기로 했다.

오후 4시, 회사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주스 병을 가방에 챙겨 넣은 하진의 휴대전화가 미친 듯이 울렸다. 발신인은 혜선이었다.

“하진아…… 나 지금 벤치 앞인데, 이상해.”

수화기 너머 혜선의 숨소리가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네 전화를 받기 전부터 건너편 골목에 서 있던 검은색 세단에서……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둘이 내려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짙은 선팅에 번호판이 가려진 차야…… 준혁이 오빠 노트에 적혀 있던 그 차가 틀림없어!”

하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혜선아! 거기 서 있지 말고 당장 사람 많은 백화점 로비로 뛰어!”

그 순간, 수화기 너머로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과 거친 고함이 섞여 들었다.

“가만히 있어! 소리 지르면 여기서 죽는다!”

“사람 살려요! 납치범이에요!”

혜선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카메라 가방이 둔탁하게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플라스틱과 화장품이 깨져나가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백화점 정문의 보안요원들과 시민들이 웅성거리며 달려들자, 당황한 괴한들은 혜선을 보도블록 위로 거칠게 밀쳐내고 차에 올라타 도주했다.

하진이 택시에서 뛰어내려 벤치 앞으로 달려왔을 때, 혜선은 무릎이 까지고 옷이 찢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혜선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하진아…… 놈들이 우리 뒤를 완전히 밟고 있어. 시간이 없어.”

하진은 가방에서 꺼낸 오렌지 주스 병을 혜선의 미니 손전등 불빛에 비추었다. 유리 라벨 안쪽에 가느다란 유성펜으로 정밀하게 적힌 글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남해군 창선면 대사리 산 42번지, 삼천포 옛 선창 창고 3호 / 0816#]

혜선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노트북을 켜고 언론사 기업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했다. 노트 뒷면에 연필로 적혀 있던 1970년대 토지 수탈 조직 '장두'의 후신 기업. 현재 남해 리조트 개발 사업을 독점하고 있는 지주회사 '한양 인터내셔널'의 법인 등기부등본이 화면에 떴다. 대표이사 명단을 확인한 순간, 하진의 숨이 그대로 멎어버렸다.

[대표이사 회장: 한병철]

하진의 친오빠. 언제나 자상한 미소로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가문의 유일한 자랑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바로 그 오빠였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우리 오빠가 그럴 리 없어……”

하진은 머리를 감싸 쥐고 절규했다. 준혁이 왜 그토록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왜 끝내 사랑한다는 고백 대신 "기억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차가운 밧줄 속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 잔인하고 흉측한 진실의 덮개가 비로소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 * *
15장. 심야의 고속도로

가을비가 잦아든 자정 무렵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은 대형 화물차들이 뿜어내는 디젤 매연과 젖은 노면의 마찰음으로 자욱했다. 하진은 운전대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와이퍼가 유리창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앞유리 너머로 흩뿌려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져나갔다.

조수석에 앉은 혜선은 조명등을 켜둔 채 무릎 위에 펼친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트북 모니터 우측 하단에는 준혁의 자취방에서 동기화해 온 시스템 데몬 창이 실시간으로 신호를 띄우고 있었다.

[NET-SYNC: SECURE SOCKET LISTENING]
TARGET_IP: 211.234.xx.xx (NAMHAE_NODE_03)
PING_INTERVAL: 10 SEC
SYSTEM_STATUS: ARMED / STANDBY
    

“하진아, 뒤차 간격 좀 벌려봐.”

혜선이 사이드미러를 응시하며 낮게 속삭였다. 천안 분기점을 지나면서부터 3차로 뒤편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던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차선을 바꾸며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번호판 조명이 꺼진 채 미등만 희미하게 켠 차였다.

“놈들이야…… 백화점 앞에서 날 덮쳤던 그 차 맞아.”

“어떻게 해? 휴게소로 들어갈까?”

“안 돼. 휴게소로 들어가면 인적이 드문 진입로에서 길을 막고 차를 통째로 들이받을 거야. 준혁이 오빠 노트를 봐. 30년 전 상원 아저씨를 밀어 떨어뜨렸을 때도 똑같은 수법이었어. 사고사로 위장하려는 거야.”

혜선은 휴대전화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선배, 저 혜선인데요. 사회부 데스크에 지금 바로 보고 올려주세요. 제가 말씀드렸던 남해안 토지 수탈 및 한양 인터내셔널 비자금 관련 핵심 증거 확보하러 현장 내려가는 중인데, 지금 경부선 하행선 추풍령 부근에서 미행 차량이 붙었습니다. 차량 모델 검은색 그랜저, 번호판 식별 불가. 제 위치 추적 링크 보도국 시스템에 실시간으로 물려두세요.”

전화를 끊은 혜선이 안전벨트를 고쳐 매며 하진의 어깨를 짚었다.

“하진아, 다음 IC가 금강이야. 나들목 빠져나가는 척하면서 감속 차로로 붙었다가, 마지막 램프 구간 직전에 본선으로 급하게 복귀해. 놈들이 출구로 밀려 나가게 만들어야 해.”

“내가…… 할 수 있을까?”

“해야 해. 우리가 창고에 먼저 도착해야 해.”

하진은 이를 악물었다. 금강 IC 500미터 전방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진은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켜고 차를 감속 차로로 급격히 꺾었다. 뒤따르던 검은 세단 역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거리를 좁히며 램프 구간으로 따라붙었다.

나들목의 곡선 주로가 시작되는 분기점 바로 앞, 도로 한가운데 세워진 플라스틱 탄력봉이 코앞으로 다가온 찰나—

“지금이야, 핸들 왼쪽으로 꺾어!”

하진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운전대를 왼쪽으로 사정없이 잡아챘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짓이기며 비명을 질렀고, 차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간신히 본선 1차로로 튕겨 나가듯 복귀했다. 뒤따르던 검은 세단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나들목 램프 구간의 가드레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진출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빠져나갔다.

룸미러 속에서 멀어지는 붉은색 브레이크등을 확인한 하진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핸들을 쥔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남해로 내려가는 어두운 아스팔트 길 위로, 안개 낀 남해대교의 주탑이 서서히 새벽빛을 머금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 * *
16장. 3호 창고

새벽 4시 40분. 삼천포 옛 선창가의 낡은 방파제는 짙은 해무와 짠 갯벌 냄새에 잠겨 있었다. 폐업한 냉동창고들과 붉은 녹이 슨 크레인들이 줄지어 선 부두 귀퉁이, 잡초가 어른 무릎 높이까지 자라난 '대사리 산 42번지' 진입로 끝에 빨간색 슬레이트 지붕이 흉측하게 주저앉은 3호 창고가 홀로 서 있었다.

하진과 혜선은 헤드라이트를 끄고 차를 100미터 떨어진 폐조선소 뒤편에 숨겼다.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다가간 창고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고리 옆에는 비바람에 삭아버린 구형 전자 다이얼 패드가 달려 있었다.

하진은 가방에서 꺼낸 오렌지 주스 병 밑바닥의 숫자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0816#

손가락 끝으로 고무 버튼을 꾹꾹 눌렀다. 삐-빅 소리와 함께 내부에서 무거운 쇠빗장이 풀리는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자, 수십 년간 갇혀 있던 썩은 가마니 냄새와 눅눅한 소금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고 안쪽 구석, 거미줄이 엉겨 붙은 오래된 목재 궤짝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진은 무릎을 꿇고 궤짝 뚜껑을 들어 올렸다. 안쪽에는 1976년 12월의 빛바랜 신문지 뭉치와 함께, 붉은 가죽 표지의 수첩—아버지 상원이 구들장 밑바닥에 목숨 걸고 숨겼던 바로 그 원본 장부가 기름종이에 싸인 채 놓여 있었다.

장부를 펼친 하진의 손가락이 떨려왔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강제로 빼앗긴 토지 지번, 조작된 인감 날인, 뇌물을 받아먹은 당시 군청 계장들의 실명, 그리고 항의하다 바다에 빠져 의문사한 춘배 숙부를 비롯한 마을 농민들의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장부의 맨 뒷장, 이 모든 살인과 수탈을 기획하고 결재한 조직 '장두'의 지분표 상단.

[총책임자: 한병철 (인)]

피보다 붉은 인주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게…… 오빠가 쌓아 올린 성공의 실체였어……”

하진의 눈물이 붉은 수첩 표지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쾅-!

등 뒤에서 벼락이 치듯 창고 철문이 거칠게 닫히며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기어코 그걸 찾아냈네. 준혁이가 지 목숨 버려가며 꽁꽁 숨겨둔 걸.”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 세 개가 하진과 혜선의 얼굴을 정면으로 내리비췄다. 손전등 뒤로 걸어 나온 사내는 용두였다. 그의 양옆에는 쇠파이프를 든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둘이 버티고 서 있었다.

용두는 점퍼 주머니에서 번뜩이는 금속제 송곳을 꺼내 손가락 사이로 찰랑거리며 다가왔다.

“하진아, 네 오빠 한 회장님이 널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알지? 너한테 이런 더러운 꼴 안 보이게 하려고 준혁이 그 새끼를 조용히 처리한 건데, 왜 굳이 여기까지 기어 내려와서 사서 고생을 하냐?”

“닥쳐!”

혜선이 하진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소리쳤다.

“준혁이 오빠를 자살로 위장해 죽인 살인자 주제에 어디서 주둥이를 놀려!”

“기자 양반, 입조심해야지. 여긴 서울이 아니야. 여기서 둘 다 실족해서 뻘밭에 처박히면, 30년 전 상원 영감탱이처럼 그냥 '야간 실족사'로 끝나는 곳이라고.”

용두가 사내들에게 턱짓을 했다.

“장부 뺏고, 둘 다 입 막아.”

사내들이 거친 발소리를 내며 쇠파이프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하진아, 지금이야!”

혜선이 몸을 날려 앞서 오던 사내의 다리를 걷어차며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그 틈을 타 하진은 주머니에서 준혁의 낡은 통신 단말기를 꺼내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치지직-!

단말기 상단의 붉은 LED가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LOCAL TRIGGER: NAMHAE_NODE_03 ACTIVATED]
SYNCING WITH CENTRAL REPO...
PING COUNTDOWN: 00:30
    

단말기 액정에 붉은색 숫자로 '30'이 떠오르며 1초마다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가오지 마!”

하진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창고 안을 뒤흔들었다.

“준혁이 오빠가 시스템에 뭘 심어뒀는지 알아? 이 창고 문이 열리고 단말기가 서버와 30초 이상 신호를 유지하면, 이 붉은 수첩의 스캔본 전체와 창고 안의 음성이 경찰청 본청 서버와 방송사 보도국 데스크로 자동 라이브 전송되게 설계되어 있어! 네가 날 건드리는 순간 한병철과 너희가 30년간 저지른 모든 살인과 토지 수탈 기록이 생중계된다고!”

용두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송곳을 쥔 그의 손가락에 균열이 일었다.

“뭐…… 뭐라고?”

“카운트다운 보이지? 20초 남았어. 네가 우릴 건드려 신호가 끊어지거나 시간이 끝나면, 한병철과 너희가 30년간 저지른 모든 살인과 토지 수탈 내역이 대한민국 전체에 생중계된다고!”

“거짓말 마! 이 기집애가 어디서 사기를 쳐!”

용두가 눈이 뒤집혀 하진을 향해 송곳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COUNTDOWN: 00:05]
[COUNTDOWN: 00:04]
[COUNTDOWN: 00:03]
    

콰아앙-!

창고의 낡은 함석 벽면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무너져 내렸다. 눈부신 서치라이트 불빛 수십 개가 창고 내부를 대낮처럼 밝혔다.

“경찰이다! 전원 무기 버리고 엎드려!”

방탄복을 입은 경찰특공대와 수사관 수십 명이 부서진 벽 틈으로 들이닥쳤다. 혜선이 출발 전 경찰청 출입기자단과 특별수사대에 공유했던 실시간 GPS 데이터, 그리고 큰누나 명주와 한혁이 수사대원들과 함께 이 폐창고로 달려왔다.

“손 올려! 움직이면 발포한다!”

쇠파이프를 들고 있던 사내들이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엎드렸다. 용두는 송곳을 쥔 채 뒷문으로 달아나려다 진입한 특공대원의 개머리판에 턱을 얻어맞고 진흙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차가운 쇠수갑이 용두의 양 손목을 옥죄었다.

[SYSTEM ALERT: TRANSMISSION COMPLETE. 100% DISPERSED.]

단말기 액정에 초록색 완료 메시지가 뜨며 34년간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이 세상 밖으로 활짝 열렸다. 하진은 손에 쥔 붉은 수첩을 품에 안은 채 주저앉아 오열했다. 바다 안개 너머로, 1976년 겨울 상원이 피웠을 그 화롯가의 붉은 잔불이 마침내 악의 어둠을 모조리 태워버리는 거대한 빛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삼천포 3호 창고의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깨진 형광등 불빛 아래로 짙은 화약 냄새와 갯벌의 짠내가 엉겨 붙어 있었다.

경찰특공대의 거친 제압 끝에 쇠수갑을 찬 용두와 괴한들이 끌려 나가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방파제 너머로 아스라이 멀어지고 있었다. 혜선은 창고 벽에 기대앉아 피가 배어 나오는 입술을 소매로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진은 부서진 목재 궤짝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품 안에는 34년 전 상원이 아궁이 속에 숨겼던 붉은 가죽 수첩이 안겨 있었다. 장부의 마지막 장, 선명하게 박혀 있던 붉은 인주 도장.

[총책임자: 한병철]

그 이름 석 자가 망막에 불도장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진아…….”

혜선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하진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하진의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조각들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되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남해 시골집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가 자수성가했다며 명절마다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내려오던 오빠 한병철.

대학 입학식 날 하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우리 집안에서 가장 맑고 똑똑한 내 동생, 오빠가 세상의 어떤 비바람도 다 막아줄 테니 너는 높은 곳만 바라보고 살아라” 하고 다정하게 웃어주던 그 반듯한 얼굴.

그 모든 사랑과 보호가, 실은 남해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준혁의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밀어 떨어뜨린 대가였다니.

'오빠가 지은 건 회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피로 만든 무덤이야.'

구토감이 밀려왔다. 하진은 입을 틀어막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위장이 뒤틀려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자신이 입었던 단정한 옷, 유학 시절 쓰던 학비, 서울 강남의 번듯한 오피스텔까지—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모든 안온함이 이 붉은 수첩에 적힌 억울한 죽음들의 핏값 위에 얹혀 있었다.

그리고 준혁.

그 맑고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사람.

중학교 시절 비 내리던 하굣길 처마 밑에서 낡은 우산을 쥐여주고 빗속으로 뛰어가던 소년. 강남역 커피숍에서 말없이 자신의 무거운 배낭을 받아 메어주던 선배. 그리고 9월 23일, 마지막 백화점 벤치에서 떨리는 손으로 오렌지 주스 병을 건네며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도 나를 기억해달라"고 속삭이던 그 남자의 메마른 입술.

준혁은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더러운 악연의 진실이 하진을 무너뜨릴까 두려워 끝끝내 입을 닫고 혼자서 그 지옥 같은 고통을 짊어진 채 차가운 밧줄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준혁이 오빠…… 왜…… 왜 혼자서…….”

하진은 붉은 수첩을 가슴에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창고 바닥을 치며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살이 찢겨 나가는 비명과 같았다.

혜선은 아무 말 없이 하진을 뒤에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혜선의 눈시울도 붉게 젖어 있었다.

한참을 울부짖던 하진의 어깨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진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눈물로 짓무른 눈동자 속에서, 주저앉아 있던 연약한 소녀의 그림자가 걷히고 단단하고 서늘한 결의가 차올랐다.

하진은 궤짝 모서리를 짚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선아.”

“응, 하진아.”

“서울로 가자.”

하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쇠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준혁이 오빠가 자기 목숨과 맞바꿔서 지키려 했던 게 무엇인지 이제 알았어. 내가 오빠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도망치거나 숨지 않을 거야. 내 피 속에 원수의 피가 흐르고 있다면, 그 죄를 증언하고 심판대에 올리는 것도 내 몫이야.”

하진은 품 안의 붉은 수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창고 문밖으로, 남해 바다의 짙은 해무를 뚫고 핏빛 같은 새벽 태양이 수평선 위로 서서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34년간 이어진 거짓의 장막을 찢고, 마침내 서울의 법정과 심판대로 향하는 하진의 가장 비장하고 차가운 첫걸음이었다.

제5부. 남겨진 선율
17장. 30년 만의 증언과 대질 심문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705호 특별조사실. 방 안의 공기는 30년 전 도립병원 305호의 바닥처럼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철제 테이블 맞은편, 어머니 정희는 모직 목도리를 목에 여러 겹 두르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깊게 파인 주름진 손이 종이컵 표면을 힘없이 매만지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헝클어진 머리에 푸른색 수의를 입은 용두가 수갑을 찬 채 앉아 있었다. 담당 부장검사가 서류철을 넘기며 정희에게 조용히 물었다.

“김정희 어르신. 1980년대 초 남편 박상원 씨가 비탈길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했던 당시 상황…… 기억나시는 대로 진술해 주셔야 합니다.”

정희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실눈 하나가 지퍼가 열리듯 삐꼼히 떠지며 유리창 너머의 용두를 똑바로 응시했다.

“기억하다마다요……”

정희의 갈라진 목소리가 조사실의 정적을 긁어내렸다.

“그날 새벽에…… 복구가 하도 짖어서 문을 열었을 때, 마당 감나무 뒤로 빠져나가던 놈의 얼굴을 봤소. 그리고 상원 씨가 피투성이가 돼서 실려 왔을 때, 상원 씨 점퍼 뒷덜미가 억센 손에 쥐어뜯겨서 찢어져 있었소. 동네 사람들은 술 취해 굴렀다 캤지만, 나는 알았당께…… 놈들이 상원 씨를 밀어 죽였다는 걸.”

정희의 메마른 손가락이 유리창 너머 용두를 가리켰다.

“저놈 애비 장우식이, 30년 동안 우리 집을 기웃거리며 상원 씨 숨통을 조이고, 끝내 내 막내 준혁이까지 목을 매달아 죽인 놈들이 저놈들이오!”

정희의 눈가에서 참아왔던 굵은 눈물방울이 알갱이처럼 쪼르르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남편을 잃고, 막내아들마저 가슴에 묻어야 했던 한 여인이 30년 동안 삭여온 피눈물의 고발이었다. 용두는 고개를 떨군 채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강남 한양 인터내셔널 본사 38층 회장실. 문이 거칠게 부서지듯 열리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창밖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병철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대형 TV 화면에서는 삼천포 창고에서 발견된 1976년 토지 수탈 장부 원본과, 준혁의 서버에서 릴리즈된 뇌물 장부 파일이 특종 속보로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진이 수사관들 사이를 지나 오빠 한병철의 앞에 섰다.

“오빠.”

“준혁이 오빠가…… 왜 죽어야 했어? 오빠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걸 알고도, 날 지키려고…… 혼자서 그 지옥 같은 침묵을 견디다 죽어갔어. 오빠가 사람이야?”

하진은 품 안에서 상원의 붉은 수첩과 준혁의 노트를 꺼내 회장실 대리석 책상 위에 내던졌다. 한병철의 차가운 눈빛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하진아…… 난 널 위해 이 회사를 키웠다. 그 가난한 뻘밭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거짓말 마.”

하진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빠가 지은 건 회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피로 만든 무덤이야. 그리고 그 무덤 안에 준혁이 오빠와 오빠 자신을 묻어버린 거야.”

수사관이 다가와 한병철의 손목에 차가운 은빛 수갑을 채웠다.

“한병철 회장, 살인 교사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끌려나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며, 하진은 로비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평행선처럼 엇갈리며 34년을 이어온 두 가문의 잔혹한 악연이 마침내 법의 심판대 위에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 * *
18장. 편지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1형사대법정. 법정 안은 취재진과 방청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했다. 피고인석에 앉은 한병철은 푸른색 수의를 입은 채 덤덤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고개를 숙인 용두가 앉아 있었다. 방청석 맨 앞줄, 검은색 상복을 입은 하진의 곁에서 혜선이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었다.

재판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판결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피고인 한병철은 1970년대 남해 일대에서 폭력과 사채를 동원해 다수의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불법 강탈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피해자 박상원 및 박준혁을 살해 교사한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 피고인의 범행은 한 가정을 참혹하게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바, 이에 주문을 선고한다.”

법정이 숨을 죽였다.

“피고인 한병철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피고인 용두를 징역 20년에 처한다.”

탕! 탕! 탕!

세 번의 무거운 법봉 소리가 법정의 정적을 갈랐다. 한병철은 눈을 감았고, 방청석에서는 유족들의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왔다. 하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거대한 어둠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으나, 준혁이 떠나간 빈자리의 시린 통증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그날 저녁, 하진은 혜선과 함께 방배동 준혁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의 짐을 정리하던 중, 하진은 완전히 부서진 철제 서랍장의 이중 바닥 틈새 깊은 곳에서 아직 뜯지 않은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 겉면에는 단정한 준혁의 필체로 '하진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은 하진은 눈물로 얼룩진 편지지를 펼쳤다.

하진아.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나는 이미 네 곁에 없을 테지.

너를 처음 보았던 중학교 교정에서부터 강남역 계단 배낭까지, 너는 내 가난하고 어두웠던 삶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햇살이었다.

네 오빠의 이름을 그 피 묻은 장부에서 처음 발견했던 날, 내 세상은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너를 원망해야 할지, 사랑해야 할지……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아무런 숨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진아, 너는 그 추악한 죄악의 가해자가 아니다. 너의 그 맑은 눈웃음과 소박한 마음은 결코 더럽혀져서는 안 될 빛이다.

우리 가문이 짊어져야 했던 34년의 잔혹한 악연은 내가 모두 안고 갈 테니, 부디 너는 그 사각의 그늘에서 벗어나 따뜻한 세상에서 활짝 웃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기억해줘,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 준혁

편지를 가슴에 품은 하진은 텅 빈 방바닥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 혜선은 말없이 하진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았고, 방창 밖으로는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길게 스쳐 지나갔다.

선고 공판이 끝난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취재진이 터뜨리는 플래시 불빛이 눈이 시리도록 번뜩였다.

교도관들의 손에 이끌려 호송차로 향하는 한병철의 발걸음은 덤덤했다. 푸른색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채였지만,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차가운 눈빛은 34년 전 남해 갯벌 둑길에서 검은 승용차 창문을 올리던 그 오만한 침묵 그대로였다.

그 긴 호송 행렬의 맨 끝, 복도 기둥 뒤편에 검은 상복을 입은 하진이 굳은 채 서 있었다.

한병철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서며 하진의 창백한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한병철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린 시절 남해 시골집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가며 동생의 손에 알사탕을 쥐여주던 오빠의 눈빛과, 수십 명의 농민을 수장시키고 준혁의 목을 조르라 명령했던 살인마의 눈빛이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기괴하게 교차했다.

한병철은 무언가 입술을 달싹이려다 이내 고개를 돌려 차가운 철제 호송차 계단 속으로 몸을 실었다.

철커덩—

무거운 쇠문이 닫히며 세상과 단절되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 복도를 울렸다.

“하진아…….”

곁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던 혜선이 하진의 얼음장 같은 손을 감싸 쥐었다.

하진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호송차가 빠져나간 어두운 통로를 멍하니 응시했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향했고 법적인 죗값은 내려졌지만, 그것으로 비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빠가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죄악의 멍에는 이제 고스란히 동생인 하진의 가슴속에 평생 씻어낼 수 없는 낙인으로 남겨졌다.

'준혁이 오빠…… 오빠가 온몸으로 막아주려 했던 그 저주받은 진실이, 이제 내 평생의 십자가가 되었어.'

하진은 가방 속에 든 준혁의 낡은 일지 노트와 마지막 편지 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법원 청사를 나서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메마른 초겨울 바람이 낙엽을 흩날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34년 전의 불씨와 차가운 밧줄의 기억이 잠들어 있는 남해의 언덕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잃고 아들을 묻은 정희의 앞에 무릎을 꿇는 참회의 길뿐이었다.

* * *
19장. 남해의 언덕, 하얗게 내리는 눈

12월 29일. 남해 창선면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 34년 전 화롯가의 잔불을 품에 안고 외롭게 싸우다 떠난 아버지 상원의 봉분 옆에, 막내 준혁의 작은 유골함이 묻힌 묘비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 정희는 굽은 허리를 굽혀 아들의 차가운 묘비를 거친 손으로 쓸어내렸다.

“막내야…… 고생했다. 네 아버지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던 그 무거운 짐을, 네가 혼자 짊어지고 가느라 얼마나 외롭고 아팠노……”

정희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흐른 눈물이 묘비석의 글자를 촉촉하게 적셨다. 큰누나 명주와 군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섯째 한혁이 어머니의 양팔을 부축했다.

하진은 검은 코트 품 안에서 정성스레 접은 준혁의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묘비석 옆, 작은 돌 틈 사이에 편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준혁 오빠…… 오빠가 목숨으로 지켜준 내 삶으로, 이제는 내가 참회하고 정의를 증언하며 살아갈게. 오빠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어.'

그때, 잿빛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흩날리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29일, 일곱 번째 아이 준혁이 태어나던 날 밤 대지를 뒤덮었던 그 함박눈처럼, 차가운 눈발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기 시작했다. 상원이 화롯가에서 지켜보았던 붉은 잔불도, 문밖을 서성이던 검은 그림자도, 34년을 이어온 피와 눈물의 한(恨)도 순백의 눈송이 아래 평온히 잠들었다.

하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흩날리는 눈꽃 사이로, 9월의 벤치에서 환하게 웃어주던 준혁의 맑은 얼굴이 따스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자, 하진아.”

혜선이 다가와 하진의 옷깃을 여며주며 손을 꼭 쥐었다. 사각의 주차선 안에 갇혀 있던 그을린 상념은 눈발 속에 흩어져 사라지고, 남겨진 자들의 발걸음 위로 하얗고 깨끗한 새로운 눈길이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